이미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
젊은 토마스 머튼은 어느 날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학(St. Mary’s College)의 학생에게 질문을 받게 된다.
“관상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을 하고자 머튼은 실제로 “관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의 영적 여정과 수도생활의 화두가 되었다.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초기의 머튼은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가르침에 충실했다.
실제로 「관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 보면 머튼의 고유한 부분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이해를 간단히 요약해 놓은 정도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머튼은 계속되는 수도생활의 여정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루이빌에서의 하느님 현현(顯現)과 같은 깊은 관상을 체험하였다.
토마스 머튼, 루이빌에서 깊은 관상 체험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기쁨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여 나누었으며, 동시에 더 깊은 관상적 체험을 위해 더욱 철저한 고독과 침묵을 갈망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관상적 체험을 통해 자신과 사람들, 그리고 타 종교를 통합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성장해 나아갔는지 그 과정과 그 열매들을 분석해 본다면, 우리가 관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필자는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연구하면서 그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공헌했다고 본다.
①관상의 개념에 대한 명료화
②전통적 관상 개념의 현대화. 머튼의 이러한 공헌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 안에서 관상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관상에 대한 이해와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부터 출발해 보도록 하자. 사실 관상이란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통해 운명을 예견’하는 단어, 관상(觀相)과 그 소리가 같아 혼동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토마스 머튼의 많은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될 때, 그가 본래 제목에 사용한 ‘Contemplation’이란 단어를 ‘명상’ 혹은 ‘마음’으로 번역(가령, New Seeds of Contemplation은 ‘새 명상의 씨’, Contemplative Prayer는 ‘마음의 기도’로 번역됨)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관상, 수동적이고 하느님 중심적이어야
그러나 실제로 관상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한자어 자체가 주는 특별한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관(觀)은 ‘볼 견(見)’ 자에 ‘황새 관()’이 더해져 그 의미는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상(想)은 ‘서로 상(相)’과 ‘마음 심(心)’이 더해져 ‘생각, 사색, 그리움, 닮음’ 등의 뜻을 지닌다. 그래서 관(觀)과 상(想), 둘을 합치면, ‘서로 마음으로 자세히 바라본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관상 기도는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관상을 뜻하는 희랍어 θεωρια (theoria, 눈 혹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를 한자 觀想으로 묘사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명상(冥想: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깊이 사물을 생각함)이나 묵상(默想, 잠잠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고활동을 통한 기도하는 이의 능동적인 활동이라면,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의 관상은 수동적이고 하느님 중심적임을 잘 묘사하고 있다.
희랍어 θεωρια는 라틴어 Contemplatio(콘템플라시오)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 역시 관상의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Contemplatio는 con-(함께)과 templum(성전)의 합성어이다. 즉,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3장 16절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라고 한 말씀에 적용해 본다면, 관상은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과 함께하는 것, 혹은 함께 사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내 마음 비우고 정화하여 예수님 사랑 실천
그리고 라틴어 temp(템프)는 ‘제단 앞에 정화된 공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우리 몸과 마음과 영을 정화해야 한다는 것도 Contemplatio라는 용어가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관상이란 용어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이, 실제로 토마스 머튼은 관상과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미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강조하였다.
관상은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 일치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그분이 거하시는 내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깨어나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관상적인 삶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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