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자 료 실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9) 교황 개별알현

dariaofs 2020. 2. 20. 01:30

교황님과 단둘이 앉아 부른 ‘희망의 노래’



▲ 필자가 교황님 서재(집무실)에서 개별알현을 하고 있다. 개별알현의 대화 내용은 비밀이 절대적으로 보장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하다니, 언감생심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그것도 교황님 집무실에서 단둘이 앉아 38분 동안이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니!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으로 근무할 때에도 대통령과 독대해 본 적이 없었는데(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들과 독대하지 않음), 특명전권대사 자격이긴 하지만 평범한 평신도가 교황님과 독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공적인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2018년 2월 16일, 그날은 마침 한국의 설이었습니다. 평화의 제전이라 할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지만, 한반도 상황은 몹시 엄혹했습니다. 북핵 문제를 놓고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갈등이 한층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북한과 미국은 상대방에게 ‘불바다’, ‘화염과 분노’ 등 격한 발언을 쏟아내며 대치하고 있었지요. 저는 교황님께 한반도의 정세를 설명해 드리고 SOS를 구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신임장 제정식,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신임장을 교황님에게 드리는 외교 의전입니다. 전임 대사들로부터 특별 과외를 받고 리허설도 하는 등 사전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도궁 입구에서 집무실까지 통과한 문이 몇 개나 될까. 문이 정말 많더군요. 7개? 8개? 너무 긴장한 탓에 문을 몇 개 통과하여 교황님 집무실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의전관들 안내에 따라 걸어가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난생처음 연미복을 착용한 데다 보폭과 속도가 의전관들과 맞지 않아 걸음이 자꾸 뒤틀렸습니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 천장과 벽에는 온통 거룩한 성화! 나중에 확인해 보니 통과한 문이 무려 12개였습니다.


한참 걸어갔더니, 하얀 옷(수단)에 흰 모자(주케토)를 쓴 교황님이 빙긋이 웃으시며 반겨주셨습니다.

교황님과 악수한 다음, 두 손을 꼭 잡고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서툰 이탈리아어로 성모송을 암송하기 시작하자, 교황님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함께 해주셨습니다. 교황님의 유머 감각은 듣던 대로였습니다.


교황님이 제 가족과 인사하면서 딸아이에게 가벼운 농담을 건네자, 엄숙하기만 하던 사도궁이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온몸을 얼어붙게 했던 긴장감이 모닥불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때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교황님과의 독대, 즉 개별알현(private audience)의 대화 내용은 고해성사처럼 비밀이 절대적으로 보장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하라는 취지죠. 방문자가 대화 내용을 공개하려 할 경우에는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접견실에서 상견례를 마친 다음, 가족과 직원들을 놔두고 혼자 교황님을 따라 서재(집무실)에 들어갔습니다. ‘교황님께서 한국 국민에게 설 선물을 주셨으면 좋겠는데….’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교황님의 농담 한마디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바뀌면서 고민거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 한반도를 옥죄고 있는 매듭이 많습니다. 성모님이 매듭을 푸셨듯이, 한반도의 매듭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교황님의 대답은 시원시원했습니다. “내 마음과 머리에 항상 한반도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늘 응원합니다.”

교황님은 저의 고민거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반도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알현을 마친 후 공관에 돌아와 외교부 본부에 교황님의 말씀을 대외비로 즉각 보고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은 지금도 비밀입니다.

베탕쿠르 몬시뇰(의전장)의 농담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몬시뇰은 접견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저의 알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혹시 교황님께서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해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고 하더군요. 평소 교황님이 한반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극적인 국면 전환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한반도 평화를 위해 더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