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2월 20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dariaofs 2020. 2. 20. 06:19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자기 견해가 있습니다. 대개 자신의 지식과 체험으로 걸러낸 의견일 겁니다.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보는 시각 안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내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 자리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남다른 관계성에 주목하여 그분을 정의하지요. 그렇다면 좀 더 예수님 가까이 머물며 배우는 제자들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그 마음을 알고 싶어하십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 29).

베드로가 답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기적과 표징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자비를 익히 보아온 그의 대답에는 자신의 희망과 꿈 또한 숨어 있습니다.


이민족의 억압 속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중에게 메시아, 그리스도는 단지 종교적이고 영적인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인 해방을 이끌어낼 지도자여야 합니다.

"많은 고난 ... 배척 ... 죽임 "(마르 8,31).

그런 베드로의 속마음, 제자들의 야망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진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라는 예언자의 소명 뒤에는 모욕과 업신여김과 죽음이라는 예언자의 운명이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권력과 영예를 입은 예언자는 대부분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30).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복음사가는 비교적 단호한 표현을 강도 높게 사용하여 예수님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온전한 희생 제사를 향해 가는 그분의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담겨 있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걸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소리를 듣자 베드로가 나섭니다.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뭔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감히 주제 넘게 이를 바로잡으려 합니다.

잠시 제1독서를 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는 이는 부자와 빈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6).

엄격한 신분제도와 그에 따른 빈부 격차가 일반화되어 있던 사회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서로 평등한 형제자매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에 대한 차별은 관습의 보호 아래 당연시 되어버린 오점이지요.

복음 속에서 감히 스승을 꼭 붙들고 반박하던 베드로가 단지 사랑하는 스승님의 안위가 염려되어 그랬을까요? 혹시 베드로는 가난이 두렵고 혐오스러워서 그랬던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영광의 주님만을 고대하는 이에게 십자가의 치욕과 죽음은 처절한 실패에 불과합니다. 아직 예언자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스승의 실패가 곧 자신의 실패요 몰락입니다. 그러니 절박히 달려들 수밖에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질서를 잃게 되는 것은 십중팔구 악의 장난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세상을 섬기고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무질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믿고 아끼는 제자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악의 농간에는 단호한 대처가 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하느님 시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의 세속적 의미가 전복됩니다. 세상의 가난한 이는 믿음의 부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세상에서 온갖 것을 누린 부자는 자칫하면 밀려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예수님이 부유하고 능력 출중한 성공 모델이어서 좋아합니까, 아니면 자청해 겪어내신 최악의 가난이 벗님 때문임을 알기에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누릴 수 있어서 따릅니까, 아니면 그 모두를 다 잃어도 그분만 얻으면 모든 걸 소유한 것임을 믿기에 따릅니까?

오늘 우리 귀에 울리는 수난 예고가 우리 각자에게 도전인지 격려인지 고요히 머물러 봅시다.


예수님을 뜯어 말리고 싶은지, 어떤 길이 되어도 그저 따르고 싶은지 주님과 조곤조곤 이야기 나눠봐도 좋겠지요.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는 물음에 나만의 답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니?"

사랑하는 연인에게 꼭 확인받고 싶어하는 질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