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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 - 말씀 묵상

dariaofs 2020. 3. 15. 12:37

엄강섭 레오 신부(대전교구 목동성당 주임)


2020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깨달음은 삶으로 완성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동안 쌓은 것은 무너트려야 하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이 깨달음을 살아가는 것이다.

깨달음을 산다는 것은 한 번의 깨달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깨달음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런 삶에 대해서 동경하면서도 포기하게 된다.


2020년 3월 9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용서는 힘들다

용서가 힘든 이유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

인간이 용서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길 때만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서를 통해서 신과 일치하려 하고 

용서는 바로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방법이 된다.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용서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난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그들은 신에게 내어 맡기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그들은 신을 믿는 이들을 보면서 용서를 믿는 것이 어리석다고 하면서도

믿는 이들에게는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자신들의 도덕성은 자신들의 이익 앞에 밀려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그것을 요구한다.

사실 모든 믿는 이들이 완벽한 도덕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믿는 이들은 이상과 목표를 신의 완전함에 두지만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늘 실패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신의 자비와 용서에 희망을 가지는 이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약함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믿지 않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기에 자신의 낮은 도덕심에는

합리화를 하면서 믿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에 열을 올리고 

그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현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만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이 어렵다.

이런 어려운 시대에는 함께 힘을 모아야 하지만 

오히려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는데 관심이 더 많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갈라지게 만드는 언론들을 매일 듣는다.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이럴 때 자신의 노력보다는 불평을 먼저 한다.

왜 신은 이럴 때 가만히 있느냐

원래 그들은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피해가 가거나 어려울 때는 신을 원망하고 탓을 신에게 돌린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소극적으로 위축되고 숨어들게 된다.

  

믿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더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신에게 청한다

그리고 우리의 안전을 신께 맡기고 도와주길 간청한다.

그래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단순히 서류적으로 신자인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삶의 문제이다.


2020년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역효과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형제가 어려운 일이 있다고 조언을 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형제가

너는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나보고 하라고 하냐?”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조언을 해 달라고 해 준건데, 화를 왜 내냐?”고 하니,

그 형제가 그걸 아는데도 듣고 있다 보니 화가 난다.”고 했습니다.

 

내 삶이 안 되면 좋은 이야기도 힘을 잃고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역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말만하는 것은 별 효과를 주지 못합니다.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목적을 가지고, 높은 사람 소리를 들으려고

낮추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높여주시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기대를 하지 맙시다. 이것만큼 추한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남 위에 올라가려는 이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합시다.


2020년 3월 11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박찬호 124승 인터뷰

“124승을 세운 그날 밤, 호텔 방에서 펑펑 울었다.

기뻐서가 아니라 어이없고 허망해서 몇 시간 동안 소리내 울었다.

노모 히데오의 기록(123)을 깨보겠다고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어서도 이를 악물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더라.

124승을 세우니까 나를 밟고 125승을 세울 후배가 생각나

‘200승까지는 세워야 하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몸부림을 쳐도 더 잘하는 후배들이 나올텐데 .... 이길 자신도 없었다.

그때 누구보다 더 높은 자리에 가는 것을 성공이라 부르는 것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박찬호 인터뷰 중-

 

남을 이기고 올라서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막상 올라서보니 허망하고 아무것도 없더라는,

그리고 이제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부담감이

나를 더 억누르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공도 아니며 진정한 행복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지만 섬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섬김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섬기는 것은 아닌 것이죠.

그리고 섬기는 것을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판단의 잣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는 것이 불행하다고,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섬김과 성공, 섬김과 행복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개념입니다.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어떤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성공이 될 것입니다.


2020년 3월 12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부자는 뭘 잘못한 것일까요?  

율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모았다는 말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자신의 재력으로 다른 사람을 짓밟지도 않고 탈세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애정도 있는 듯한데

왜 그는 그토록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바로 무관심입니다.

그 부자는 라자로를 보았습니다. 아니 라자로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자로의 아픔이 자신에게 전혀 다가오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자의 잘못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필리핀에 가셨을 때,

집을 잃고 교회 시설에 사는 12살 된 소녀가 참석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많은 아이가 마약과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하느님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걸까요?”


교황님은 울먹이는 소녀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시고

이 소녀를 꼭 끌어안아 준 다음 이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신이 슬퍼할 줄 알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내 코가 석자라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다른 이들의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시끄럽고 귀찮게 여기기도 합니다.  

악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선한 이들의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지요.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악을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3월 13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모르면 고생합니다.

산티아고 길에서 어떤 청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선배가 크루즈 여행을 하고 와서 들려준 에피소드라고 합니다.

 

그 선배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크루즈 배에 탑승했습니다.

오랫동안 소망했던 크루즈 여행을 드디어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비싼 뱃삯을 내느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소비했기 때문에

배 안에서 쓸 돈이 없어서 식사시간에도 식당에 가지 못하고

주린 배를 쥐어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렇게 화려한 크루즈이기에 식사비도 엄청날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며칠을 굶고 나니 이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먹고 보자라는 생각으로 식당으로 내려가 무조건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렇게 실컷 먹은 후에 그는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러서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돈이 하나도 없지만 너무 배고파서 그냥 먹었습니다.

밥값 대신에 제가 청소라도 하면 안 될까요?”  

이 말에 승무원은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대답했지요  

손님, 무슨 말씀이세요? 손님의 뱃삯에는 이미 식대가 다 계산되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도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에,

혼자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져서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모르면 몸이 고생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 역시 모르면 우리의 삶이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2020년 3월 14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부모님의 입장

하느님 = 자비하신 부모님

 

부모님의 입장은 형과는 아주 다릅니다.

자식이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거 바라지 않습니다.

아마 부모는 자식이 뉘우치지 않고 뻔뻔하게 돌아와도 받아주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식이 내 품 안에 있는 가입니다.

 

뻔뻔해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부모님의 마음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립시다.

좀 부족하더라도,

좀 덜 착하더라도,

준비가 좀 덜 되었더라도,

하느님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을 우리를 당신 품 안에 품으시길 바라십니다.


2020년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오늘 이 말씀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편한 신앙 생활을 해 왔습니다.

성당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교회는 마치 신자들이 와주기만 해도 감사하다는 모습을 보였고,

신자들도 성당에 나가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취미 생활 하듯이, 동아리나 클럽처럼 생각하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19’라는 질병이 성당 문을 닫아버렸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혐오, 더 나아가 종교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불신하는 사회를 만들었고

이제는 예배가 영상으로 대체해도 되는 것인양 만들어 버렸습니다.


평화방송 시청률이 오른 것 외에는 이득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럴 때 진실한 예배자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매일 성당에 찾아오시는 분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다른 이들에게 기도를 권면하는 이들,

성당에 다시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영적인 갈망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그분들을 보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게 됩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이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물 한잔 달라는 예수님의 청으로 시작하여

종교적인, 그리고 영적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굉장히 단계적인데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종교적인 이야기, 그리고 영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를 주도하시는 것은 예수님인데 이 여인은 아주 잘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 내가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라고 말이죠.

그때까지 제자들에게도 확실하게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이 여인에게 한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여인을 삶이 문란한 여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손님을 데리고 와서 당당히 말할 수 있고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말하자,

사람들이 다들 거부감 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이 여인은 마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화가 영적인 대화라고 가정할 때,

이 여인과 예수님이 말하는 남편이 육신의 남편이 아니라

모시는 주인, 즉 신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인데, 예수님의 그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모시는 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것을

이 여인은 바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영적인 것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우물은 물을 길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연인을 만나는 곳, 또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정교회 전승에서는 마리아가 천사를 만난 곳이 집이 아니라 우물이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전 남편()이 다섯, 현재 남편도 제 남편이 아니니,

이제 그리스도가 일곱 번째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가 상징하는 숫자를 생각해 보면, 이제 완전한 남편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의 방황은 끝났고,

다른 신을 만나기 위해 우물가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제 7번째 신이 이 여인에게 목마름을 채워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미사가 중단되니깐,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떠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미사 중단의 시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방송으로도 미사를 보고

신령성체로 만족하고 성당에 안가도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좋은 휴가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영적인 목마름의 시간이 되어

영적인 것에 대한 소중함을 체험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늘 영적인 목마름 때문에 우물가로 나갔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영적인 것을 갈망하며 생명의 물을 찾아 우물가로 나갑시다.


2020년 3월 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근본적인 문제  

초등학교 지리 시간에 배운 내용 같은데요.

강물이 넘치면 우리는 보통 둑을 더 높입니다.

그런데 다음 해에도 강물을 둑을 넘어 옵니다.


그러면 또 더 높이죠.

사실 둑을 높여도 그만큼 강바닥이 높아져 매년 강물이 범람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둑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강바닥을 긁어야 하는 거죠.

 

우리가 쌓아올린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은

내 생명을 잃는 것과 같은 공포로 다가옵니다.

죽을 각오로 그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내 생명을 위협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쪽을 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변화하지 못하고 죽음과 같은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더 높은 성을 쌓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 그리고 길들여진 신앙은

우리를 눈멀고 귀먹은 신앙인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 즉 성당에 다니고,

기도문을 외우고, 묵주를 들고 다니고 성경을 통독을 하고

봉사 활동을 다니고 같은 외적인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회개로 근본적 태도의 내적인 변화까지 있어야 합니다.


2020년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제 거기서 벗어나라

서로가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둘이 모두가 암에 걸렸습니다.

한 사람은 저놈 때문에 암에 걸렸다면서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더 키워 나갔고,


한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해서 병에 걸렸구나!”

반성하며 미움을 줄여나갔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저도 정말 보기만 해도 미운 형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제 눈에 못마땅했고, 화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형제의 이야기만 들어도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형제의 못마땅한 부분들을 많이 다른 형제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제 불만을 형제들이 잘 들어주었지만,

점차 제가 그 이야기만 하면 형제들이 듣기 싫어하고

화제를 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은 겁니다.

 

어느날, 한 형제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형제는 레오 네가 아무리 그렇게 흥분해도

아무렇지 않게 기쁘게 자신의 삶을 살아 갈거야.


그러니 레오도 이제 거기서 벗어나라.”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미움의 시작은 그 형제였을지 몰라도 그 미움을 키우고

그 미움에 사로잡힌 것은 저 자신이었던 겁니다.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항상 지옥 속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내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해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덤으로 용서받는 체험을 하는 사람 역시 하느님 체험을 할 수도 있겠죠.

그것은 저의 영역이 아니라 그 형제가 하느님과 셈해야 할 부분이겠죠.


2020년 3월 18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율법의 완성은 실천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규정과 법규들은 실천하라고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면 하느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가 준 규정과 법규들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실천하면 하느님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규정과 법규들을 중요시 여기고 이것을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며 지키게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이 규정과 법규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법조문에 매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모세가 준 규정과 법규들은 실천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법조문들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켜야 하는 것, 어기면 안되는 것, 어떻게 하면 법을 어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다양한 하위 법들이 나오게 됩니다. 법을 만들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 하면서도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규정과 법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규정과 법규들의 목적을 잘 알고 계셨고 이 규정과 법규들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규정과 법규의 완성은 처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을 때처럼 이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법을 진정 실천하는 사람은 법을 무시하지 않고 또 두려움에 사로잡혀 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020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베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 아빠! 감사해요


아버지와의 관계  

수도원에서 형제들, 남자들과만 지내다보니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형제들의 삶의 모습, 특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모습들 안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했느냐가 짐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체험은

하느님 체험에도, 특히 성부 하느님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예전에는 보통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뚝뚝해서 표현을 잘하시지 않고,

표현을 하실 때는 화를 내시거나 야단을 치시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칭찬과 사랑을 보여주시기 보다는

잘못되었을 때 교정하려는 모습이 많이 체험이 되었죠.

그래서 아버지의 모습은 권위적인 모습으로 많이 체험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랬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자랑거리인데, 그 자식이 자랑할 만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자랑스러운 자식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에 비해 어머니는 자식이 잘났던 못났던 품어주시죠.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우리는 힘들 때, 성모님을 더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하느님을 무섭고 부담스럽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아버지관 안에서 성부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했을 때는 자랑스러워하시고

우리가 잘 못하면 벌 주시는 그런 하느님으로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할 때가 더 많을까요? 잘 못할 때가 더 많을까요?

잘 못할 때가 더 많겠죠.

그래서 성부 하느님은 두려움의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감히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런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아빠!”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에게 이 아빠 하느님의 체험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바로 요셉 아버지를 통해서 체험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 안에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자비롭고 사랑의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역시

예수님께서 요셉 아버지를 통해 체험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런 비유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체험이 하느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두려운 아버지관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싫어하면서도

윗사람에는 두려움을, 그리고 아랫사람에게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반대로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관을 가진 이들에게는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권위적인 이들에게는 대항합니다.  

성 요셉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그 무엇보다도

아들 예수에게 자비롭고 사랑의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섭고 두려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20년 3월 20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사랑은 동사다

- 오스카 햄머스타인의 <사랑은>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 노래가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도 / 한쪽으로 치워 놓아선 안 된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 사랑이 아니니까.

 

위의 시구가 말하듯이 종은 울려야 하고 사랑은 주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동사입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 기억하십니까?

저는 이 광고가 사랑의 변덕스러움을, 바람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하나의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들렸습니다.

 

사랑한다는 감정은 사랑하는 행동에서 나온 결심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잘해 주게 되고,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공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믿고 지지해 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런 행동이 없으면 사랑을 하는게 아니죠.

사랑을 받기만을 원하면 이런 행동을 해주는 쪽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여기서 내가 사랑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 사랑이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입니다.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을 않는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또 그 존재를 위해서

사랑하기 위한 행동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사랑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실행합시다.

이 계명은 실행할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2020년 3월 21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바리사이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이다.

 

바리사이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리사이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하느님을 부르고 감사의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중심이 자기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더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비난까지 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께 드리는 것인데, 바리사이는 자신에게 모든 공로를 돌립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앞에서 꼿꼿합니다.

하느님을 불렀지만,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주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잘 보아야 합니다.

그는 단 한 마디의 기도 안에 기도의 본질을 다 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다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전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마음, 어떤 태도,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기로 합시다.


2020년 4월 12일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 강론


거리두기는 단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이 잘 느껴지지 않는 밤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정복하리라 기대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며 두려워했던 제자들의 모습처럼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부활절을 기다리던 우리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화려하고 뭔가를 정복하는 부활의 모습이기보다는

자신을 내어주고 비움으로써 오는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빈 무덤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부활이 아닙니다.

장소적이고 물리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물으십니다.

평안하냐?”

이 평안이 우리에게 부활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평안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부활 체험을 가로막습니다.

 

어떤 두려움일까요?

나의 안전이 다른 이들로부터 해쳐질까 하는 두려움,

즉 타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경계하게 만들고,

서로를 분리시키는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이웃들과 사랑을 나눌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분별한 접촉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나와 상대방을 배려하는 안전 수칙을 따르면서

어려움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들의 실재적 거리두기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미움이나 혐오가 아닙니다.

단절과 잘라내기 역시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죠.

 

원래 이 용어는 서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을 거리를 둠으로써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이 거리두기를 일상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그 목적이 서로가 서로를 더 제대로 보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어려움을 더 잘 헤아리며

그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노력합시다.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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