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돋 보 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 역사·시대적 배경<3>

dariaofs 2020. 8. 18. 01:40

가진 것 모두 버리고 가장 가난한 ‘미노레스’가 되다

 

                                                     ▲ 포르치운쿨라 성당 내부.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그의 아버지와 갈등을 드러나게 되었다. 아버지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하는 장사와 가문의 명성을 망칠 거라는 걸 확신하였다.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 수리를 위해 벽돌을 구걸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을뿐더러 거지들과 어울리면서까지 거지들에게 돈을 물 쓰듯 주어버리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피카 부인은 프란치스코에게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에트로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아버지 앞에서 옷을 다 벗어버리고 절연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가족의 재산에 대해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 시의 집정관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봉헌된 사람이었기에 직접적으로 주교의 권위 아래 있었다.

 

시의 집정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에트로는 아시시의 주교인 귀도(Guido)에게로 갔다.

프란치스코는 이제 이 어려움을 받아들였다. 재판은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에서 가까운 주교관 앞에서 열렸다. 귀도는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던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순명하여 가지고 있던 돈을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피에트로는 당황한 채로 집에 돌아갔고,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얼마 동안 아시시를 떠나 살았다. 가는 길에 프란치스코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는 그 강도들에게 자신이 ‘위대한 왕의 사자’라고 말하였다.

 

그 강도들은 그를 어느 가난한 멍청이 정도로 생각하여 그를 눈구덩이에 던져 넣고는 떠났는데, 프란치스코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산 베레콘도(San Verecondo)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주방 봉사를 하며 지냈고, 그 후에는 굽비오에 있는 페데리코 스판달룽가(Federico Spandalunga)라는 친구의 집에서 일하였다. 그런 다음 그 근처의 한 나환우 공동체에 머물면서 나환우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1206년 여름에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로 되돌아가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시시 시내로 들어가 벽돌과 음식물 찌꺼기를 구걸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는 그런 음식물 찌꺼기를 먹는 것이 역겨웠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그런 험난한 길을 배워 가야 했다.

 

그는 아시시에서의 진짜 ‘미노레스(minores-하층민)’가 상인들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소외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부자 청년이었을 때에도 그는 가난한 거지들의 삶의 양식을 이해하고자 원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더욱더 강하게 체험하게 되면서 가난한 이와 동일화하고자 하는 원의는 더욱 커졌다.

 

그가 로마에 있는 사도들의 무덤으로 순례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어떤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그 거지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온종일 있었다.

산 다미아노 성당과 포르치운쿨라 수리

프란치스코는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면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부드러운 프로방스 지방 방언으로 나지막이 노래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열정적으로 힘차게 일하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농부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하였지만, 그가 젊은이다운 활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을 볼 때에는 아마도 애정 어린 마음으로도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이 장차 젊고 우아한 여성들이 하느님을 섬기러 올 거룩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전기작가들은 이 말이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인들’(Povere Dame di San Damiano - 초기의 ‘가난한 클라라의 자매들’을 이렇게 불렀다)과 관련하여 한 예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짧은 시간 동안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성당들, 즉 성 베드로 성당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즉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성당을 수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후에 이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운동(프란치스칸 운동)이 태동한 자리가 되었다. 이 성당은 아시시 아래쪽에 있는 움브리아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이 성당을 숲 속에서 발견하였다.

 

이 성당은 수바시오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속해 있던 것이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곳의 수사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 작고 초라한 성당을 사용하게 해주리라 생각하고 자그맣고 초라한 이 성당의 수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있다 프란치스코는 그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부터 그 성당을 사용할 허락을 얻게 되었다.

 

바로 얼마 후, 그가 이 성당을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중 하나”라고 자기 형제들에게 소개할 만큼 그에게는 이 성당이 매우 사랑스러운 곳이 되었다. 1226년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그는 그곳에서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



은수자의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그의 삶에 있어서 많은 중요한 사건들 때문에 논란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는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맞추어 일어났다.

 

프란치스코는 미사 중에 복음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지팡이나 지갑도 없이 사도들을 맨발로 설교하러 파견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순회자 혹은 순례자가 되어, 그들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설교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매우 기뻤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바였다. 그는 그가 들은 것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와 신발 그리고 은수자의 허리띠를 벗어버리고, 타우(T) 모양으로 된 겉옷을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띠를 매고 맨발로 나갔다.

 

그는 회개하는 은수자의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장차 프란치스칸 운동을 도래케 한 이상이 되었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