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을 위한 변명, 신앙의 자유란 무엇인가
▲ 이백만 주교황청 한국대사가 바티칸 민속박물관을 찾아 고문서연구실 관계자와 함께 ‘황사영 백서’ 진본을 살펴보고 있다. |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황사영 백서’가 여기에 이렇게 있었구나! 순간 배론 성지의 토굴이 생각나고, 200여 년 전 서소문 밖 형장에서 팔다리가 찢겨 죽어가는 황사영(알렉시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2월 바티칸 민속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관리 책임자인 마펠리 신부의 안내를 받아 고문서 연구실에 들어갔더니 백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워낙 귀중한 사료여서 특수 제작한 상자에 넣어 문서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한국 대사 일행이 온다기에 특별 개봉해 놓았다고 하더군요. 붓글씨를 금방 쓴 것처럼 보관 상태가 좋아 보였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신앙의 힘으로 써내려간 글
제가 놀란 것은 사실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 작은 비단 조각(가로 62cm 세로 38cm)에 어떻게 이 많은 한자(1만 3311자)를 써넣을꼬! 글씨가 깨알같이 작습니다. 제 눈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황사영은 시력이 무척 좋았던 것 같습니다.
백서의 내용은 차치하고, 황사영은 이렇게 많은 한자를 어떻게 오탈자 하나 없이 써내려갔을까. 경이로울 뿐이었습니다. 자칫 한 글자라도 실수하면 전체를 다시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백서는 황사영이 1801년 충북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신유박해의 실상과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한 비밀문서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한 신앙고백입니다.
황사영은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조선의 폭정을 막아달라고 청나라와 프랑스에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보낸 자위적 차원의 SOS(긴급구조요청)였습니다. 위협을 느낀 조선의 조정은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반역행위를 했다며 대역죄인으로 극형에 처했습니다. 찬바람 휘날리는 음력 11월 겨울이었습니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볼 때마다 황사영 백서가 겹쳐졌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9년 9월 AP통신은 특별한 사진 한 장을 보도했습니다. 홍콩 시위대가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미국 의회에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의 통과를 촉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트럼프 대통령, 홍콩을 해방시켜주세요”라고 쓴 깃발도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미국에 SOS를 보낸 것입니다. 중국은 민족반역 행위라며 시위대를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황사영 사건과 같은 구도 아닙니까? 황사영은 혈혈단신 심산유곡에서 ‘1인 저항’을 했고, 홍콩 시위대는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집단 저항’을 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홍콩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민주주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황사영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엇갈립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엄청나게 바뀌었는데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황사영은 권력을 탐하지도, 정권을 찬탈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추구했을 뿐입니다. 조선에는 신앙의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100% 보장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시각에서 황사영을 봐야 합니다. 황사영은 천주교를 보편적 진리로 여겼기에 요즘으로 치면 UN에 탄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황사영은 단지 조선의 실정법을 위반했을 뿐입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입니다.
다시 보자 황사영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을 위반하여 고통을 겪었던 분들이 모두 복권되었듯, 황사영도 역사의 법정에서 복권되어야 합니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오슬로대학 박노자 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일각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황사영을 외세 숭배자로 부르지만, 그가 진정으로 숭배한 것은 모든 지구인이 공동으로 섬길 수 있는 보편적인 신이었습니다. 종교인을 정치사적 기준으로 심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우리 역사 최전선」 박노자 하동현 공저, 푸른역사)
황사영은 백서를 쓰며 그것이 비오 11세 교황에게까지 전해지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그의 혼이 깃들어 있는 백서를 한 번 안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마펠리 신부가 저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백서의 모퉁이만 살짝 만져 보라고 특별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와 이백만 요셉, 실로 219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뜨거운 전율이 감돌았습니다.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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