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례 상 식

[미사의 모든 것] (17)기도 동작

dariaofs 2020. 11. 26. 00:14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는 일치의 표지 ‘기도 동작’

 

▲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취하는 통일된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한다는 일치의 표지다. 일어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진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며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다. 【CNS 자료 사진】

 


나처음: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차별을 느껴 마음이 편치 않아요.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이 일반인이 성경을 읽을 때는 앉아 있다가 신부님이 읽을 때는 모두 일어서는 거예요. 미사에도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차별이 있다는 게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예비신자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조언해: 평신도가 낭독하는 미사 독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기에 앉아서 들을 수 있으나 신부님이 선포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감히 앉아서 들을 수 없으므로 일어서는 게 아닐까? 맞죠! 신부님.


라파엘 신부: 말씀 전례 복음 말씀이 다른 미사 독서의 하느님 말씀보다 더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야. 미사 전례의 성경 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고 있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당신 구원 계획을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때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게 하셨지.

 

인간의 죄를 대신하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해 주셨단다. 말씀 전례의 성경 독서는 이 구원의 역사를 하느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관되게 전달해 주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말씀 전례 성경 독서는 모두 봉독자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고 끝맺음을 하지. 복음 봉독이 말씀 전례의 정점이나 독서와 복음 말씀의 우열을 가리거나 구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 늘 똑같은 권위로 하느님 말씀을 공경하고 합당한 예를 표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란다.

나처음: 그런데 왜 자꾸 앉았다가 일어섰다 하나요? 조용한 분위기에서 미사에 집중하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일어섰다 앉았다 해서 분주함마저 들어요.

조언해: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취하는 통일된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한다는 일치의 표지야! 내 취향대로 내 마음대로 미사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전통 관습 안에서 함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라파엘 신부: 미사 중에 신자들이 취하는 동작은 다 뜻이 있단다.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해 보마. 먼저, 기능적인 동작이야.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동을 말해. 예를 들어 성합과 성작을 닦는 것, 사제가 손을 씻는 것, 제대를 향해 행렬을 지어 입당하는 것 등이 기능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지.

 

두 번째로 말과 행동을 함께함으로써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드러내는 동작이야. 입당 예식 참회 기도 때 “제 탓이오” 하면서 가슴을 치는 행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 마지막으로 상징적인 동작이 있어요.

 

사제가 영성체하기 전에 성체 조각을 성혈과 섞는 행위라든가, 세례식 때 영세자에게 흰옷과 초를 주는 행위 등이 그 예이지. 말씀 전례 성경 독서 때 일어서고 앉는 것 또한 상징적인 동작에 속한다고 여기면 돼.

일어서는 자세는 ‘존경과 공경’의 표시야. 모임 때 윗사람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일어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가 성당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모두 일어서서 존경을 표하는 것이지.

 

또 사제(또는 부제)가 복음을 읽을 때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여겨 모두 일어서서 듣는 거야. 마치 내가 응원하는 운동팀이 골을 넣거나 홈런을 칠 때 벌떡 일어나 환호하듯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알렐루야”를 힘차게 노래하면서 일어서는 것이지.

일어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태도를 가다듬음을 뜻하지. 앉아 있을 때의 편안한 자세 대신 자제하는 자세, 단정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지. 이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야. 서 있는 자세는 그 무언가를 긴장하고 깨어 있으며 즉각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음을 표하는 것이지. 그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서슴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서 있는 것이지.

사실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관습이기도 해.(탈출 20,21; 33,10; 느헤 8,5; 에제 2,1; 다니 10,11)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단다. 바로 ‘일어섬’은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특히 부활 시기 삼종기도를 바칠 때는 일어서서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게 교회의 관습이지.

아울러 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진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마르 11,25; 루카 18,13)이며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야.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주일과 부활 시기에 무릎을 꿇지 말고 서서 미사를 하도록 의무화하기도 했지.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자유인,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단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지로 서서 기도하는 자세를 갖춘단다.

또 서서 기도하는 것은 사제직을 수행하는 이의 자세야.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은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들의 직분만을 뜻하지 않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물려받은 모든 신자를 말하는 것이야. 그래서 사제는 항상 서서 미사를 주례하고, 신자들도 기도하는 부분에는 모두 일어서서 주님의 사제직에 동참하는 것이지.

앉음은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듣는 자세야. 예수님께서도 어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앉아서 들으셨지.(루카 2,46) 또 라자로의 동생인 마리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 곁에 앉아서 들었으며(루카 10,39),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도 당신 주위에 모여 앉아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셨지.(마르 3,31; 마태 5,1 이하)

이렇게 앉음은 스승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자세일 뿐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경청하는 겸손의 자세이기도 해. 미사 말씀 전례 때, 독서와 강론을 들을 때 신자들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할 수 있지.

기도 동작 중 ‘무릎 꿇음’의 자세도 있단다. 사람은 간절할 때 무릎을 꿇지. 아울러 무릎 꿇음은 상대를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지. 예수님께서도 수난 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단다.(마태 26,39) 또 사도행전에는 베드로(9,40)와 바오로(20,36) 사도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나오지.

그래서 미사와 기도할 때, 하느님을 경배하고 주님께 간절히 청할 때 무릎을 꿇지.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때나 장엄 기도 때, 그리고 성당에 들어설 때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와 제대, 십자가 등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지. 하지만 요즘은 무릎을 꿇지 않고 허리를 굽히는 큰 절로 바꾸어 하기도 해.

무릎을 꿇는 것은 아울러 ‘뉘우침을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해요. 이런 면에서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는 서는 자세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지. 그래서 고해실에는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하도록 무릎틀을 마련해 놓았단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의 묵상 글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마. “우리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보다도 자신을 더 작게 느낄 때가 어디 있겠는가…절로 작아진다. 어느새 키를 반으로 줄이게 된다. 인간은 무릎을 꿇게 된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허리까지 굽히게 된다. 이렇게 낮아진 모습이 아뢰는 것은 ‘당신은 지대한 하느님이시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뜻이다.”(「거룩한 표징」 중에서)

리길재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