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저승 경험은 구원 위한 세 여인의 배려
성모, 인류의 죽음 그냥 못 봐
성녀 루치아에게 단테를 부탁
성녀는 베아트리체에 도움 명령
피사 사본 ‘베아트리체, 루치아, 마리아’(1385년 경)
‘신곡’(La Comedia)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죄와 슬픔과 비참에서 은총 상태로의 영혼의 회심’이다. 그러므로 프레체로는 「회심의 시학」에서, 단테의 시적 여정은 본질적으로 출애굽(Exodus)의 여정이며, 회심의 예시(Figura)라고 말한다. 주인공 단테의 전망에서 보면 산꼭대기로의 길을 가로막는 최종 장애는 암늑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의 전망에서 보면 최종 장애는 죽음의 강이다.
그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바다보다 넓은 강물 속에서 그에게
닥쳐오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가?
(지옥 2,106-108)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에서의 탈출은 죽음의 강 요르단을 건너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나서야 민족적 서사시가 된다. 마찬가지로 단테의 ‘희극’(comedia, 지옥 16,128;21,2)은 바로 자아의 죽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요르단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하강(下降, katabasis)이다. 죽음의 강은 진정한 삶의 서곡이다. 전통적으로 강 속으로 내려감은 죽음과 악마에 대한 승리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 구약의 의인들을 약탈한 승리와도 유사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III,39,4)에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왜냐하면 요르단강은 언젠가 약속의 땅, 약속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로 열려있었던 것처럼, 세례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개방됨을 의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안에는 은총의 완전함에로의 상승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겸손으로의 하강을 요구한다.” 문학의 맥락에서 저자의 승리인 시는 주인공의 죽음을 내포한다. 단테의 체험에 관련된 자아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옥 편의 드라마는 감상할 수 없다. 도착된 세상에서는 거짓 자아의 소멸만이 진정한 삶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는 타인을 위한 신앙 고백으로 써진다.
죽음의 강과 동일시되는 암늑대에게 몰려 단테가 다시 어두운 숲으로 곤두박질하는 바로 그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사부(師父)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가 출현한다.
내 눈물을 보고 그분이 대답하셨다.
이 어두운 곳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너는 다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지옥 1,91-93)
연옥 편(30,136-138)에서 베아트리체도 단테가 지옥을 편력해야만 했던 이유를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 지옥 편의 서곡인 제2곡 서두에서, 단테는 자신이 살아있는 몸으로 저승을 편력할 자격이 있는지 사부에게 묻는다. 자신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섭리로 건국된 로마제국의 영웅 아이네아스도, 곳곳에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운 ‘선택받은 그릇’(사도9,15) 성 바오로도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니 자신의 주제넘은 저승 편력은 ‘미친(folle) 여정’(지옥 2,35)이라는 것이다. 이에 사부는 단테가 그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왜 자신이 안내자가 되었는지 그 사연을 말해준다. 성모 마리아는 단테(=인류)의 죄로 인한 죽음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조명(照明)의 은총을 상징하는 성녀 루치아에게 단테를 부탁한다. 피렌체에는 성녀 루치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둘 있었는데, 단테는 평소 눈병 때문에 눈의 수호 성녀인 루치아에게 전구를 청하곤 하였다.
238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난 루치아는 박해 때 눈알이 뽑히며 순교하였다고 한다. 성녀 루치아는 단테가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불러 단테를 도우라고 명한다. 죄로 죽을 수도 있다는 단테 때문에 눈물에 흠뻑 젖은 베아트리체 또한 베르길리우스를 찾는다. 시인인 단테를 그의 훌륭한 문학으로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테는 이 저승 편력이 자신을 죄의 죽음에서 구하기 위한 하늘 궁전에 계신 축복받은 세 여인의 배려였음을 알게 된다. 그림에서 원은 초월적 세계를 상징하며, 그 원 밖으로 손이 나온 것은 초월적 세계로부터의 특별한 배려를 의미한다. 발타자르는 「영광」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여성적 중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를 끌어올리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상징 이상이다. 그것은 실재이고 끊임없이 실재의 모든 단계를 통해 위로 확장되는 것이다. 연인의 만질 수 있는 지상의 신체로부터 영광스럽게 된 모습을 지나, 성인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성녀 루치아와 수용적이고 처녀 생식적인 교회의 원형이자 기초인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자 단테의 가슴은 다시금 뜨거운 열정으로 흘러넘친다.
마치 밤 추위에 고개 숙이고 오므라진 꽃들이
햇살이 그것들을 쬐어줄 적에
함빡 그 줄기부터 피어 치오르듯이.
(지옥 2,127-129 : 최민순 옮김)
이 3행은 이탈리아어 사전에 예문으로 나올 만큼 시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최초의 성년(聖年)인 1300년 성금요일 저녁 드디어 단테는 용기를 내어 지옥으로 향한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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