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한 분이시기에 모든 존재의 현실도 하나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⑦창조된 세상 안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생태 영성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삶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인간 실존이 지니는 모든 것을 초월하거나 벗어나기를 택하지 않으셨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피조물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의 가치를 격하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품위를 하느님으로까지 들어 높여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런 관계성 안에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또 모든 존재가 그런 관계성 안에 존재할 때 피조물 하나하나가 부분적 전체(holon 혹은 fractal)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관계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존재의 본능에 박아주셨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우리 인간이 생태계 위기를 겪기 이미 오래전에 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런 생태계 위기를 겪으면서 외치는 ‘자연 보호’를 훌쩍 넘어서는, 인간과 창조계 전체의 그 위대한 가치를 재발견하게끔 초대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칸 삶과 운동의 기반이자 토대이다. 이것이 바로의 우리의 소명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프란치스칸 전통 안에서, 요한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6~1308)는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을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물과 식물, 동물, 인간, 천사,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모두 통틀어서 하나의 목소리(univocity)로 말한다고 믿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기에(신명 6,4), 모든 존재의 현실도 하나인 것이다.(에페 4,3-5) 결국, 우리는 모두 존재-이야기(Story of Being) 전체의 부분들이며 동시에 부분으로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부분적 전체’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부분들이며, 그래서 ‘나’는 ‘나’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에 의해 구성되고 존재하는 것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테두리가 없는 원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이는 논리적으로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가정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힘과 현존, 그 본질에 의해 하느님은 그 중심이 모든 곳에 있지만, 테두리는 어느 곳에도 없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제약을 전혀 받지 않으신 채 존재하신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과 더불어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므로 신성하다는 것이고, 하느님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가난 부인과의 교제’에서 프란치스코가 가난 부인에게
“이 세상이 바로 우리 수도원이오!”라고 말한 바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찾기 위해 우리가 특별한 장소로 가거나 특별한 시간을 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전적으로 포용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핵심적 본질이시다.
하느님은 지극히 완전하시고 드넓으시다. 모든 것 안에 계시지만 어디에도 갇히지 않으신다. 모든 것 밖에 계시지만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어느 것에도 요원하게 계시지 않으신다. 모든 것 밑에 계시지만 그 품위가 실추되지 않으신다.…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는 그저 ‘모든 것이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범신론(pantheism)과는 완연하게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이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 즉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진리(pan-en-theism)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위대하고 기쁨에 찬 메시지이다. 그래서 이것이 진리이기에는 너무도 믿기지 않고, 너무도 좋은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생태적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환경을 보전하고 자연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짐의 놀라운 아름다움이 우리 존재 안에서 실현되고 일깨워져,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우주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우주적 재건을 이루는 것이다.
테두리가 없는 원이라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하느님과 창조된 세상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진리가 들어 있다.
테두리가 없는 원의 중심은 모든 곳이고, 모든 것이기에, 그 모든 곳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고,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의 노래(태양의 찬가)’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이 경이로운 세상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하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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