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톨 릭 상 식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20. 견진성사①

dariaofs 2021. 6. 1. 00:45

견진성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40년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85~1292항
세례의 은총 견고히 하는 성사
성체성사와 함께 성장의 과정
지속적인 성령의 도우심 통해
하느님 자녀로 거듭날 수 있어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 ‘만나의 수확’.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체성사와도 같은 만나를 먹고 성장한 것처럼, 견진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한 지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참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없다.

 

 

세례성사를 ‘태어나는 것’에 비유한다면, 견진성사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태어났다면 성장해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견진성사는 “성령의 인호”(1295)를 한 번 받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호는 한 번 받은 것일지라도, 은총 측면에서는 견진성사를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편이 낫습니다.

우선 태어남은 한 번이지만 성장은 지속적이어야 할 필요성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루마니아의 대형 보육원인 ‘요람’의 예를 들어봅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1990년 요람이 개방되었을 때 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수많은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진들을 세상에 공개하였습니다.

많은 아이가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박고 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영혼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은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습니다.

태어나기만 하고 성장의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은 것입니다. 음식만 준다고 끝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요람에는 일손이 부족하여 보모 한 명이 20~30명의 아기를 맡아야 했습니다.

보모가 하는 일은 음식을 배급해 주는 것일뿐, 아이와의 따뜻한 접촉이나 별다른 보살핌은 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부모를 통해 알아야 합니다. 늑대에게 길러져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이 믿음을 갖는 순간이 성사로 치면 ‘세례’입니다.

그리고 믿었다면 성장하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 담긴 양식을 먹는 과정이 ‘성체성사’입니다. 양식을 한 번만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먹어야 해서 성체성사는 한 번에 끝날 수 있는 성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견진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견진성사는 세례 때의 믿음이 견고해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는데, 믿음은 사랑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에 사랑을 받는 과정이 멈추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견진성사는 세례보다 성체성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보통 견진을 세례와 함께 한 번에 거행했습니다.”(1290) 그런데 지금 견진성사를 뒤로 뺀 이유는 교리 지식을 더욱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세례를 위한 교리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확정하고 동시에 세례의 은총을 견고하게” 하는 “축성 성유의 도유(myron)”(1289)의 견진예식은 아직도 세례 예식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세례 때 견진성사 예식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한참 지난 뒤에 또다시 견진성사를 받게 하는 이유는 견진성사가 세례성사처럼 일시적으로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와 함께 연속적인 성장의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례를 받았는데 왜 계속 죄에 떨어지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남은 한 번이지만 믿음을 견고히 하며 양식을 먹고 성장하는 과정은 오랜 연속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1094 참조) 그리고 요한복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성체성사와 연결합니다.(1334 참조)

그렇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성령의 도움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 강림의 은총도 교회 안에 영속되고 있습니다.”(1288) 저는 견진성사를 광야 생활 동안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위에서 솟아 나온 물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선물의 예형”(1094)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견진성사는 ‘지속적인’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온전한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에, 세례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체와 견진을 통한 지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참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 ‘만나의 수확’.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체성사와도 같은 만나를 먹고 성장한 것처럼, 견진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한 지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참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없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