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하느님과 분리할 때 ‘에고’의 감옥에 갇히게 돼
▲ 하느님의 육화 신비에 매료됐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과 하나됨을 희망했다. 엘 그레코, ‘오상을 받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 유화, 1585~1590. |
1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 의식함과 자유
우리 ‘에고’는 우리 정신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그간 익혀온 사고방식이나 논리대로 움직여가길 바란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부화뇌동하거나 떠밀려오는 정보를 식별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것을 ‘집단 최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우리 세상을 하느님 안에서 통합과 화합으로 이끌어가기보다는 분리와 대결, 옳고 그름의 이원론적 구도로 만들어가는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에고’는 악마(diabolus)가 하는 것처럼 늘 분리와 구분을 하기를 원한다. 이 ‘diabolus’라는 라틴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던진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symbolus’와 반대되는 말이다. 이 말은 ‘서로 한 방향으로 던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악마의 또 다른 말은 사탄인데, 본래 이 말은 ‘고발하는 자’를 의미한다. 상대를 고발해 자기를 옳은 자로 자처하며 다른 존재와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사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루카 복음에 나오는 ‘세리와 바리사이의 비유’(18,10-14)는 구분하고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가 바로 사탄이 역할을 하는 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성전 뒤편에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며 자신을 죄인이요 불쌍하고 가련한 자로 인정하는 자가 하느님 눈에는 의인이라는 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우리가 흔히 ‘마니피캇(마리아의 노래)’이라고 하는 ‘성모님의 찬가’를 보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과 미천함을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그분은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그분은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네.… ”
이러한 성모님의 자세는 예수님과 복음의 인격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가장 뛰어나고 특출난 모범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에고에 따라 살아갈 때, 즉 우리가 우리의 에고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단죄하며 살아가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바리사이요 사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건강한 구분이 필요하긴 하다. 특별히 인생의 전반기에는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앞서 강조한 대로,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존재하기에, 이 생명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은 결국 존재를 고통으로 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에 의해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는 중국 송나라 때의 선종사를 정리한 책인 「오등회원」에 나와 있는 것이 원본인데, 당나라 때의 청원행사라는 스님도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 화두가 지닌 근본적 의미는 모든 것이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결국은 하나라는 진리, 즉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결국 깨달아가는 과정을 함축한 말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과정에는 정반합의 원리가 적용된다. 처음에는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구분해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것-정(正)’을 확신하게 되는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둘의 다름이 우리의 관념이나 생각으로 생성된 것임을 자각해 산과 물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라는 것-반(反)’을 자각하게 되지만, 결국 이 자각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 둘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는 세상, 즉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세상-합(合)’에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이 둘이 구분되면서도 동시에 하나라는 우주의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의 집(나 자신의 존재)을 차지해야 하고, 또 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하느님과 ‘나’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너’와 ‘나’가 분명히 구분되면서도 동시에 이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기에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존재가 하느님과 분리될 때, 즉 우리가 자만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하느님과 다른 모든 존재에서 분리하게 될 때 우리는 ‘에고(가짜 자아)’의 감옥에 갇혀 계속되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차지하지 않는 상황’이다.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에는 바로 이런 ‘하나됨’과 ‘구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하느님 육화에 매료되었던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비천하고 미천한 형제-작은 형제’로 여기고자 했던 것도 이런 ‘의식’ 속에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 현존 의식과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차지하게끔 하느님을 모셔드리는 우리의 마음 자세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비결 아닌 비결이 아닐 수 없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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