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의식’은 자기 변화의 길잡이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산다면 그분 뜻에서 벗어나지 않게 돼
주님 현존 자체가 나침반처럼 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기 때문
농부가 밀밭에 서 있다. 추수철이 될 때까지 밀과 가라지는 외적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의 기준은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성체성사 안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바로잡아 주신다.
성찬례는 ‘기념’과 ‘감사’, 그리고 ‘현존’이라는 말로 종합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킨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체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심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정에서 여성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흑인 남성 피고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아서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짓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30년 만에 만난 그들은 매우 상반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후 아서는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친구 민디 글레이저 판사를 보고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자신의 ‘비교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같은 중학교에서 함께 시작하지 않았다면 글레이저 판사는 아서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비교 대상’은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범죄자가 함께 자란 친형제를 재판관으로 만나면 어떨까요? 훨씬 부끄러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함께 “아빠, 아버지!”로 부르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비교 대상이 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재판관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성찬례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만약 아서 부스가 친구 민디 글레이저를 1년에 한 번만이라도 만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면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존’(現存)이 이루시는 일이 이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분으로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신비롭게 머물러 계십니다.”(1380)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에서 주인은 하인들이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추수철이 될 때까지는 외적으로는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과 머물면서도 점점 상태가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작년보다 죄를 더 짓는가, 덜 짓는가로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밀은 더 밀이 될 것이고 가라지는 더 가라지가 될 것입니다. 이 변화의 기준이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사는 사람은 결코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 자체가 나의 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도 하늘의 천사들이 지켜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현존은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우리가 길을 잘못 들 때마다 경종을 울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욱 닮아갈 때는 만족을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 닮아갑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셨듯이, 내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체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현존의 힘입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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