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1년 10월 17일 연중 제29주일

dariaofs 2021. 10. 17. 06:06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36)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무언가 청하려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뭐라도 맡겨 놓은 듯 주님께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마르 10,40)
두 형제가 바란 것은 예수님의 곁자리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그분과 가장 가깝고 친밀한 사이로 남겠다는 충성스럽고 사랑 가득한 지향에서라기보다는, 언젠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극하실 때,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게 해 달라는 모종의 정치적 청탁에 가까웠지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같은 일화를 다루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향할 부정적 시선을 경감시키려고 그들의 어머니를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마태 20,20-28 참조)

예수님은 두 형제(우리)가 현세적 야망과 욕정, 재물과 성공을 청하러 당신께 온다면 주소를 잘못 찾은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당신이 '허락할 일이 아니'라는 뜻은 그분의 한계와 무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영광을 받으신 십자가 제사의 현장에는 두 강도가 곁에 있었지요. 그 둘의 행적이 복음서에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재물에 대한 탐욕과 욕망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다 잡힌 것으로 짐작됩니다. 둘 중 하나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갔고 한 명은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하다 숨을 거두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서 끝을 모르는 탐욕과 야망이 향하는 정점의 자리는 두 강도의 자리일지 모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혹 제자들이 예수님을 현세적 정치적 메시아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낭패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겠지요. 역사를 통틀어 어느 임금이나 영웅도 종, 노예처럼 남을 섬기거나 목숨을 내놓은 적이 없었으니 어리둥절하기도 했을 겁니다.

여러 다양한 동기로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의미를 깨닫기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속과 야망, 욕정에 물든 영혼을 정화하는 아픈 시간을 건너야 합니다. 세상 물질과 명예에 집착하는 옛 인간이 죽고, 스승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까지 수용하는 새 인간이 살아날 때 비로소 구원을 향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 메시아성의 본질을 밝힙니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
예수님은 현세적 영광을 보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순간 가난과 배척, 박해와 고난, 그리고 죽음까지 일사천리로 예약되지요. 하지만 그런 예수님을 미워할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건, 그분이 먼저 우리 모두의 속량을 위해 당신 목숨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를 원죄의 결과로 이야기하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내외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세상 곳곳에서도 자기 탓이 아닌 고통으로 무참히 짓밟히며 스러져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떠안으신 고통을 통해 세상의 고통에 존엄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은 질병과 슬픔과 고통을 겪는 약자를 업신여기고 경시하지만, 깊은 지혜를 지닌 어느 부족은 자기들 중 가장 병들고 슬프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신이 계심을 믿기 때문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올리는 눈물의 기도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도 고통은, 참 싫고 피하고 싶은 거지만, 예수님 덕분에 적어도 그 고통을 인내하고 견딜 이유는 있는 것이니, 고통도 존엄하고 귀할 수 있는 겁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화답송)
시편 저자는 우리가 주님께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노래합니다. 바로 그분의 자애, 곧 자비와 사랑입니다. 현세적 부나 명예, 성공이 아니라, 우리 앞길에 널려 있는 고통을 이겨낼 주님의 자비와 사랑,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바라야 할 바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 4,16)
우리의 대사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모든 이를 속량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치르신 값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것이지요. 이를 믿고 확신할 때, 그분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을겁니다. 이렇게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이가 바로 주님 어좌의 곁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우리 안에 이런저런 바람이 올라올 때마다 이 질문의 체로 걸러 보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바람이 감지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오직, 그분의 자애입니다. 주님의 자애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주일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