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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9) 총리에서 수사신부로 - 육징상(陸徵祥)

dariaofs 2021. 12. 26. 00:22

수도원으로 간 엘리트 외교관… ‘동서융합’ 큰 다리 놓다

외교총장·국무총리 역임하고
벨기에 수도원에서 종신서원
1946년 명예원장으로 임명
일본·독일 제국주의에 항거
중국-교황청 외교 교량 역할

 

육징상(陸徵祥, 베드로, 1871~1949)은 청(淸)말 외교관으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 벨기에 브뤼허 소재 성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Saint Andrew’s Abbey, Bruges)에서 종신서원을 한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총리 출신 수사신부다.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수도원 수사가 된 전례가 없으므로 육징상은 중국 국내외에서 관심을 받았다.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도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품을 받기까지의 소식을 국내에 전했다.

그는 왜 화려한 외교관의 길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행하게 됐을까. 그가 수도자의 길을 선택한 이유와 중국천주교회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육징상은 1946년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벨기에 성 베드로 수도원 명예원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육징상이 수도원장 예복을 입은 모습.김정현 연구위원 제공
 
 
중국 외교총장 시절의 육징상. 육징상은 1912년 초대 외교총장을 맡은 이후 1920년까지 9차례 외교총장을 역임했다.

 

■ 외교관 육징상의 개종, 영세, 그리고 공직 수행

육징상은 1871년 상해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개신교 선교단체인 런던전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외국어 전문학교인 상해 광방언관(廣方言館)과 북경 동문관(同文館)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1892년 러시아 주재 중국 공사 허경징(許景澄)에게 통역관으로 발탁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봉직했다.

허경징은 육징상을 전문 외교관이 되도록 훈련시켰다. 허경징은 육징상에게 “조국애를 실천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서구화해야 한다”면서 “유럽의 역량은 무기나 과학에만 있지 않고, 종교에 있으니, 그리스도교 종파 중 가장 오래된 조직에 들어가 핵심 역량을 획득해 중국에 가지고 오라”고 지도했다.

육징상은 외교관의 시각에서 가톨릭교회에 접근했고 나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벨기에 출신 가톨릭신자 보비(Berthe Bovy)와 1899년 성 카타리나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육징상은 외교관들과 연명으로 청(淸) 황제의 퇴위를 건의했고 그해 말, 천주교로 개종해 세례를 받았다.

새로 건국된 중화민국 정부는 평판이 깨끗하고 오랜 외국사절로 서양 사정에 밝은 육징상을 외교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귀국해 중국 외교제도를 현대화하고 관제를 제정하는 등 외교부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육징상은 제1대 국무총리가 원세개(袁世凱)의 핍박으로 사직하자, 외교총장을 겸임하며 제2대 국무총리가 됐다.

한편 1915년 일본의 강제적인 불평등조약(21개조) 요구로 어려움에 처한 원세개(袁世凱) 정권 아래서 외교총장 육징상은 일본과의 협상을 맡아 굴욕적 조항에 저항했으나, 일본의 무력과 최후통첩에 압도당한 원세개의 지시에 따라 조약에 서명하게 됐다.

그는 국민들이 자신을 매국노라고 비난할 줄 알았지만, 군사 역량이 없는 상황에서 굴욕을 참고 자신을 희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17년 육징상은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높이고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로마 교황청과 외교관계 수립을 제의했고 정부는 이를 통과시켰지만, 프랑스 정부가 선교보호권을 구실로 이를 저지해 실현하지 못했다. 1917년 11월 외교총장 육징상은 제1차 세계대전에 중국이 연합국 편에서 독일에 선전포고하게 했고, 전후 승전국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열강의 힘을 빌려 굴욕적인 ‘21개조’를 폐지하려 했으나 일본과 열강의 밀약으로 실패했다. 육징상은 항의서를 제출했고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서명을 거절했다. 이는 중국 외교사상 일대 사건이었고 이후 중국 외교관들이 국제 외교에서 과거의 불평등 조약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기반이 됐다.

 
벨기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 네브(Dom Théodore Nève) 원장(왼쪽)과 육징상 신부. 네브 원장은 육징상이 수사에서 신부가 되기를 격려했으며, 육징상이 수도원에서 중국의 항일전 홍보를 하도록 도왔다.
 

 육징상은 56세에 수도원에 입회해 3년간 수행 후 정식 성 베네딕도회 수사가 됐고, 다시 라틴어·신학·철학 등을 공부하는 힘든 훈련을 거쳐 64세에 신부로 서품됐다.

 

■ 벨기에 성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사와 신부의 길을 걷다
육징상은 파리평화회의에서 국제질서의 불평등과 국내 정치상황의 혼란에 실망하며, 가톨릭 사상에 더 깊이 천착하게 됐다.

1922년 아내가 중병을 얻자 스위스로 요양을 떠났고 그는 스위스 공사가 됐다. 1926년 투병 중인 아내가 사망했다. 중국 정부는 그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스위스 공사에서도 사퇴했다. 모든 공직 생활을 마감한 육징상은 벨기에의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가 벨기에 성 베네딕도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을 선택한 이유는 성 베네딕도회의 역사가 깊었고 사망한 아내의 조국이 벨기에였으며, 1913년 뱅상 레브 신부가 방문해 중국에 분원 설립을 요청했고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등 중국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중국천주교회에서 전개된 종교구국(宗敎救國) 특히 ‘기독 구국론’이라는 분위기도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육징상은 1927년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련에 들어가면서 복장도 이름도 바뀌었다. 그는 “스스로 옳은 길로 돌아섰다기보다는, 성스러운 부르심(聖召)”이라고 말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수도생활이 목적이었고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으나, 수도원장의 격려와 더불어 그가 신부가 돼 돌아와 중국천주교회를 진흥시키기를 바라는 중국으로부터의 요청이 있었다.

그는 56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3년간 수행 후 정식 수사가 됐고, 다시 사제가 되기 위한 힘든 공부를 마치고 1935년 6월 64세에 신부로 서품됐다.

■ 성 베네딕도 수도회와 중국천주교회에서 육징상 신부의 역할
교황청은 육징상이 서광계(徐光啟)를 잇는 중국 가톨릭신자라고 높이 평가하고 중국천주교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주목했다. 수도원에서 그는 신문이나 잡지에 중국교회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썼고, 1931년 이후 일본의 침략과 중국의 항일전 상황을 국제적으로 홍보했다.

1940년 독일군이 벨기에를 점령하고 수도원을 군영으로 사용하자 그는 점령군에 저항하는 내용의 강연을 하다가 게슈타포(독일 비밀경찰)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조국을 위해 기도하며 성 베네딕도회를 전파해 중국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베네딕도회 규칙」과 「베네딕도회 연혁사」 등의 서적을 장개석(蔣介石) 부부를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에게 보내 그들이 성 베네딕도회의 기본정신과 천주교 영성생활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또 중일전쟁에 ‘중립’을 선언한 교황청과 중국이 충돌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썼으며, 1943년 중국정부와 교황청의 외교관계 수립을 돕는 등 중국정부와 천주교회, 교황청의 교량 역할을 했다.

1946년 비오 12세 교황이 중국에 ‘교계제도’(ecclesial hierarchy)를 수립하자, 중국에서는 첫 중국인 추기경 후보로 육징상을 기대했으나 교황은 청도(靑島)대목구장 전경신(田耕莘) 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하고 육징상은 1946년 5월 벨기에 성 베드로 수도원(L’abbaye Saint-Pierre) 명예원장에 임명했다. 이리하여 육징상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의 명예원장이 된 첫 번째 중국인이 됐다.

육징상은 문화와 교육 사업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중국 안에 뿌리내리게 도왔던 근세 중국인 신앙 선배 서광계처럼 되고자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귀국을 준비했으나, 중국 국공내전과 건강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 1월 성 베네딕도회 서원 20주년 기념일에 선종했다.

벨기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은 육징상이 남긴 편지와 사진, 신문·서적 등을 보존하고 있다. 육징상이 프랑스어로 쓴 회고록은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됐고, 외교관과 사제로서 그의 역할과 동서융합사상이 중국과 유럽·미국 등에서 연구되고 있다.

김정현(미카엘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