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출근할 때 보도블록을 걷다가 촘촘히 박힌 바닥 돌 틈 사이에서 피어난 민들레를 보았다. 얼마나 대견스럽던지 끝까지 살아서 버텨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민들레를 피해서 길을 걸었다.
이튿날 아침에 길을 걷다가 민들레가 피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간밤에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미처 꽃을 보지 못해서 밟았는지 민들레는 처참하게 밟혀 있었다. 바닥에 깔린 꽃이 정말 가엾어서 내 얼굴이 찌푸려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살 터전을 벽돌로 다 감추더니 그나마 좁은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생명도 무심히 짓밟았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의식적으로 민들레가 있었던 자리를 보지 않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나는 정말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민들레는 제 몸 쓰러진 채로 탐스럽게 홀씨를 만들어 바람이 불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고, 고마운 장면이었다.
전쟁과 쿠데타로 삶과 죽음의 위기에 놓인 이들의 목숨이 저 민들레처럼 다가온다. 힘 있는 누군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밟혀져도 된다는 의식으로 무차별 총격과 무차별 무력진압이 가능한 우리 시대의 얼굴이다.
수많은 분야의 연구를 하고, 정말 똑똑한 우리는 생각으로 모든 행위를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머리만 컸다’는 말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 같다.
풀 한 포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한다면 ‘그저 그런 풀’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미미해 보이는 벌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한다면 사라져 가는 벌들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서클’ 안에서 인류가 돌보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렇게 서로에게 총질을 하거나 총을 겨누도록 부추기는 무모함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고, 힘을 모아도 늦었는데 서로의 탓만 하고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아 보인다.
주요한 결정을 하는 어른들이 절대부동이니 청소년들과 아기들이 나섰다.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3월 청소년 기후소송 이후로 2022년 만 5세 아이들의 기후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대로 가면 가장 큰 피해자는 아기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다 피지도 못한 꽃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어른들이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아기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기후위기의 난제를 감당하도록 그 무게를 계속 가중시켜 미래를 닫아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지구의 날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고, 인간은 때때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정말 무섭게 다가온다.
어디부터 회복시켜야 할까? 무심코 짓밟고 있는 발부터 옮겨 그들의 숨통을 풀어주어야 한다. 세상 모든 생명을 나와 관련된 ‘서클’ 안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한 작은 생명도 집착이나 혐오가 아니라 돌봄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과 관계할수록 용서받을 일이 적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께서 항상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고 만용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 자신을 내어주고,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신가! 이 하느님께서는 죄책감으로 골방에 숨어 있는 우리에게 용서를 넘어서서 오히려 귀한 선물을 주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차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신다. 수많은 변명을 무색케 하는 이 말씀은 참으로 평화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평화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새롭게 일으키시어 성령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신다.
날이 따뜻해지니 곳곳에 노란 민들레들이 피어났다. 이른 봄 어렵게 피어나 홀씨를 품었던 그 민들레의 새로 피어남이라는 것을 나는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는 또 새롭게 꽃망울이 맺히고 있다. 평화!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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