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2년 6월 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dariaofs 2022. 6. 22. 01:45

복음: 마태 7,15-20: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15) 우리 신앙인은 일반 대중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신앙인은 돼지와 개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리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리는 개나 돼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개와 돼지는 잘 보인다. 그러나 이리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낸다. 이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리의 공격은 그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거두지 못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덕의 가면을 쓰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20)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이다. 위선자는 수고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인은 변화할 수 없다거나 선인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악하게 살았더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악하게 사는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19)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를 맺는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다.

 

훌륭한 교사가 나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나쁜 것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막기도 하신다. 자신의 입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하느님 안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삶도 참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 또는 바울리노)는 로마(Roma)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였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갈리아(Gallia)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고 골, 이탈리아 그리고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Therasia)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의 주교 델피누스를 만난 후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공직에서 물러나 아키텐(Aquitaine)으로 은거하였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 당시에 외아들이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하였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Napoli)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폰디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水路)를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등 수없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그는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요한 피셔 주교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Margaret Beaufort)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토마스 모어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