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2년 7월 4일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dariaofs 2022. 7. 4. 01:14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치유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께 나타나 예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했던 것같이(2열왕 5,11),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 자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을 따라 같은 이름을 지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디니스 1세는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설립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와 불신앙을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리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들 아폰소 4세(Afonso IV)와 남편 디니스 1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던 그녀는 1324년 남편 디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쿠임브라(Coimbra)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그곳에는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가 있어서 인근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사망하여 쿠임브라의 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쿠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으며,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