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은 공부할 것을 촉구하며
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촉진제
물음 없이 무조건 믿기만 한다면
유아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어
헨드릭 테르부르그헨의 ‘토마스의 의심’.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선배 신앙인들은 믿음은 한 치의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경우를 들곤 합니다.
물론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인간 공동체는 분란으로 인해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기에는 심리적으로 하자가 많습니다. 즉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심리적 구조를 가진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토마스 사도를 믿음이 약한 자라고 질책을 하신 것인가?
토마스 사도는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적을 목격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상 불신감이 강해서 교정해 주시고자 야단을 치신 것이지 온전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가 갖는 의심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께서는 “신앙인은 의심을 가지고 믿는 자와 의심으로 인해 믿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인간의 한계성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또 마더 데레사 성녀도 당신의 일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심의 반복이었다”라고 고백하신바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의심은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종교인은 “의심은 마귀가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이다”라고 말해서 의심에 시달리는 신자들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의심이 의심 자체로 끝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이란 물음을 의미하고 물음은 더 공부할 것을 촉구하는 기능을 합니다.
즉 의심은 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촉진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없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심 없이 믿기만 한다면 유아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며 자아가 성장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구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구도자들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에 늘 주님께 물음을 던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에 사회는 흐르는 물처럼 되어갑니다.
그러나 물음 없이 복종하고 맹목적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공동체는 고인물처럼 되어버려서 경직된 도덕관으로 인해 융통성 없는 조직으로 변질되고 퇴행해버리고 맙니다.
더욱이 그 개인은 내사(內事)라는 심리적 독성이 생겨서 평생을 심리적인 노예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의심과 물음은 내적성장에 필수적인 것이라 하는 것이니 믿음이 약하다고 의심을 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수난 중에 아버지를 부르면서 어찌하여 당신을 버리시느냐고 부르짖으셨습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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