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지도자는 권력과 정치의 이면 냉정하게 식별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는 분열·갈등 조율하고
구체적 실천 담보할 식견 갖춰야
권력과 정치에 대한 유혹을 넘어
사목적 비전과 사명 실행해야
■ 장례미사의 상념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장례미사를 시청했다.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는 진홍색 수단을 입은 고위 성직자들과 많은 사람이 운집하고 있었다.
장엄한 예식이 진행되는 광장의 풍경 속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목관만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관의 검박한 이미지가 장례미사가 거행되는 광장의 장중한 풍경과 예식에 참여하는 숱한 사람들의 화려한 이미지들을 압도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는 주님 앞에서 한 자연인으로, 그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죄인으로 돌아갔다.
장례예식의 외적 모습과 참여한 사람들의 무게는 그가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일 뿐이다. 이승에서 그가 누구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교회 안과 세속의 숱한 지위들은 모두 다 이 지상에서의 지위였을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 이 지상의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가톨릭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표현이다. 정체성의 형성에 일상적 삶이 미치는 영향과 관련성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진술이다.
조금 확장해서 해석하면,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은 외적 지위(명사)와 일과 역할(동사)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어떻게’(부사) 살아내는가에 따라 규정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교황, 주교, 사제,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사명을 수행할 뿐이다. 지위와 역할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해 구별될 뿐이다.
지위와 그 지위에 부과된 역할이 그 사람의 거룩함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사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은 달려 있다.
■ 장례 이후의 논쟁들
역사적 인물이 죽으면 평가가 시작된다. 먼저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 역사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평가될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입장과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진정한 평가는 역사의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해외 언론들의 기사를 살펴보면 살짝 어지럽다. 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요 교회의 위계적 정점에 섰던 인물이었기에 사후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장례를 기점으로 교회 안의 보수와 진보 논쟁들이 더 격렬해진다는 느낌이다.
먼저 장례미사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됐다. 전통적으로 교황이 죽으면 교황청 선임 추기경에 의해 장례예식이 진행된다.
하지만 교회 역사에서 드문, 자발적 사임을 한 전임교황이었기에 그의 장례식은 현행 교황에 의해 거행되었다.
교황에 의한 교황의 장례식이었지만, 장례미사의 외형과 내용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식과 대조되는, 너무 소박한 장례미사였다는 것이다.
교황청이 장례미사에 더 많은 외국 정상들과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에 대한 불만도 제기되었다.
강론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대한 찬사(eulogy)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서 당시의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에 대한 긴 찬양의 강론을 한 것과 대조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장례미사 예식서 안에 장례미사의 강론은 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말이다.
조지 펠 추기경의 죽음과 그가 남긴 사후의 메모, 얼마 전 발행된 전임교황의 개인 비서였던 대주교의 저술,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유고집 발간은 교회 안의 논쟁에 불을 더 붙이는 느낌이다.
어느 저널리스트가 지적했듯이,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존재가 교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 간의 절묘한 균형점과 타협을 유지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의 부재가 논쟁을 격발시키고 갈등을 빚어지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진보 쪽에서는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젠다를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 쪽에서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라는 지지대가 사라졌기 때문에 더 강하게 자신들의 의제를 발언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픈 현실이다. 각자의 입장과 관점이 어떤 것이든, 시노달리타스를 향한 더 많은 노력이 교회 안에 절실히 필요한 시간이다.
영화 ‘두 교황’은 두 교황 간의 미묘한 긴장과 우정과 친밀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물론 영화이기에 현실의 직접적 반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정경과 현실 교회 안에서 두 교황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의 입장과 관점이 조금 다르지만, 두 교황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지키며 신앙의 우정과 친밀함을 나누고 있었음을 말이다. 언제나 문제는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 종교 권력과 정치
교회사의 한 시기가 마무리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죽음은 유럽 중심 교회에서 전 지구적(global) 교회로의 전환을, 교리와 신학의 시대에서 신앙과 삶의 시대로 이행을 알리는 징표일 수도 있다.
유럽의 세속주의와 인문적 상대주의라는 거센 파도에 대항하며 신앙과 존재의 진리를 향한 항해를 계속했던, 그의 분투와 노력은 역사적 평가로 넘겨질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분명 탁월한 신학자였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현명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뚜렷한 신학적 비전과 교회의 생태환경적 방향마저도 제시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정치력은 부족했었다.
통치는 자신의 특기가 아니라 자신의 약점이라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모차르트 음악을 사랑하며 순수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성적 확신과 신념을 지닌 투철한 지적 전사였지만, 로마 교황청의 관료 조직들을 통제하고 교회 안의 여러 추문들을 해결해나갈 통치적인 역량이 부족했다.
지위와 자리는 권력과 정치를 발생시킨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지위와 자리는 힘과 권력을 낳고 정치적 역학 관계를 파생시킨다.
종교와 교회의 지위와 자리라고 해서 권력의 역학과 정치적 역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리와 신학적 신념, 사목적 비전과 전망, 복음과 신앙의 자세와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 자리의 무게에 걸맞은 통치적 역량도 갖추어야 한다. 즉, 교회의 구조적 역학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갈등을 조율하고 구체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정치적 지혜와 식견도 가져야 한다. 종교 지도자에게는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교회 지도자는 종교 권력과 정치의 이면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제도와 조직은 없다. 제도와 조직으로서의 가시적 교회 안에는 권력과 정치의 역동이 늘 작동하고 있다.
교회 안의 모든 제도와 조직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권력과 정치에 대한 세속적 유혹을 넘어 사목적 비전과 사명을 실행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적 역량이 그리운 시절이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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