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활동했던 시대 이후인 50~150년에는 함께 빵을 나누는 것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고, 친교(코이노니아)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통상적으로 모이는 장소는 주택의 식당이었다.
그들은 빵, 포도주, 물고기를 가지고 와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그리스ㆍ로마인들의 방식에 따라 보통 먼저 식사하고 그다음에 미사를 거행한 것 같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1코린 11,33)라고 말한 것으로 보면,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너무 빨리 먹어서 늦게 온 사람에게는 음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아직은 비형식적이고 유연했다는 뜻이다. 예배의 핵심은 성만찬이었으므로 식사를 마친 다음 식당에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는 신자 수가 늘어나고 식사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이 있어 공동식사는 점차 성체성사로 바뀌었고, 예배는 점차 정식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주택의 식당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신자들은 대체로 하류층 또는 중산층이었으므로 전형적으로 싼 주택에 모였는데, 이런 주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잘 안 띈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여러 편의와 식사로 지속해서 제공하여 친교하고 성만찬을 할 수 있는 장소로는 부유한 이들의 주택이 훨씬 적절했다. 이들의 주택을 1~2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도무스’라 불렀다.
길에 면해서는 상점이 있고 입구로 들어가면 사적인 영역이 아트리움이라는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안마당에 있는 물을 담는 큰 그릇으로 세례를 줄 수 있었다.
로마 사람들의 주택에서 가장 큰 방은 식당이었다. 낮은 정사각형 식탁을 둘러싸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를 할 수 있는 긴 의자 세 개가 ㄷ자로 배열되는데, 식탁에는 이런 의자가 세 개 있는 방이라 하여 식당을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이라 불렀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의자는 입구 반대편에 놓였고 연장자 등 귀빈이 그 자리에 앉았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비스듬히 기대어 앉으셨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것을 보면(루카 7,36-37), 이런 주택의 식당은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반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사도행전 20장은 트로아스의 어떤 집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려고 모였는데, 바오로가 자정까지 설교하는 동안 에우티코스라는 젊은이가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잠에 취하여 그만 밑으로 떨어져 죽었는데, 그를 다시 살리고는 다시 빵을 떼어 나누며 식사를 했다고 말한다.
삼층이라 했으므로 이 집은 3~4층 높이의 한 가족의 건물인 인술라라는 공동주택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주택의 제일 위에는 유일한 큰 방인 식당이 있었고 종종 테라스로 열려 있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아나가이온(anagaion) 또는 히페론(Hyperōon)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최상층이다.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고, 창문에 걸터앉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으며, 자정에 이 일이 있은 다음에도 날이 샐 때까지 설교는 계속되었다 하니, 그럴 정도로 회합은 비공식적이었으며 과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애찬(Agape feast), 성 마르셀리누스와 성 베드로 카타콤. 출처=St Elisabeth Convent
‘주택 교회’ 정신 어떻게 되살릴까
그리스와 로마 전통에 따라 국가 종교만이 사원을 세웠던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건축은 200년이 돼서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단지 이 구원의 종교는 특별한 예배 형식과 이를 위해 모인 신자들의 경제적 여력에 따라 눈에 띄지 않는 하위층의 주택에서 시작하다가, 점차 여유 있는 이들에게서 빌리거나 기부받은 주택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처럼 한 가족이 일상생활을 하던 주택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정기적인 회합으로도 쓰이던 주택을 ‘주택 교회(house church)’라고 한다.
50년에서 150년까지는 주택을 그대로 교회로 사용했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증거는 매우 부족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는 4세기 초까지도 나타날 정도로 두루 쓰였다.
이처럼 교회의 출발은 주택이었고 당연히 전례도 주택에서 출발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성당에서 ‘주택 교회’의 정신은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