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산세인 앵자봉과 천진암성지는 경기도 광주8경 중 제4경으로 계절마다 신록·녹음·단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수려한 풍광으로 유명하다.
대성당 터 오른쪽 위 오솔길을 따라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를 거쳐 산비탈을 10분여 동안 오르면 매끈하고 곧게 솟은 전나무와 소나무 숲에 다다르게 된다.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을 때 주어사는 설중(雪中)인데도 이벽이 한밤중에 도착하자 각자가 촛불을 밝혀들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오늘날 학술 세미나에 해당하는 강학에서 논의된 내용은 유교 경전에서 출발했으나 「천학초함」에 나오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주요 연구 대상이었다고 한다.
강학에 참여한 이들은 이벽·권철신을 비롯해, 정약전·김원성·권상학·이총억 등이었다. 이들은 특히 주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 주일에 모든 노동을 하지 않는 파공(罷工)과, 도덕적·영적 향상을 위해 육식을 억제하는 소재(小齋) 등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도 했다.
오로지 유교만을 절대 규범으로 삼던 폐쇄적인 조선 시대에 어떻게 유학자가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들이 천주교에 이끌린 것은 우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천주의 자녀라는 ‘평등사상’에 공명한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유교적 사회질서가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을 넘어설 대안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닫힌 시대를 열고자 했던 선각자들이었다.
천진암성지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이벽을 중심으로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승훈·정약종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다섯 분의 묘소가 이장돼 있다.
묘역에서 돌계단을 걸어 30m 정도 내려가면 빙천수(氷泉水)가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이 물은 강학 참가자들이 아침·저녁으로 마시고 세수하던 샘물이다.
성 다블뤼 주교는 그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조선 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시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하여 쓰신 도구는 이벽이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오는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천진암성지에서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44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성지에서는 매일 정오에 순례자 미사를 봉헌한다.
성기화 요셉 명예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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