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왕의 친로마 정책과 폭정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동방 원정에 나섰던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유다 하스모네아 왕조의 아리스토불로스 2세 임금을 왕좌에서 끌어내고 그의 형인 히르카노스 2세를 영주로 임명합니다.
동생에게 왕좌를 빼앗겼던 히르카노스 2세가 권력을 되찾는 데에는 심복 헤로데 안티파테르의 지략이 컸습니다. 안티파테르는 유다교로 개종한 이두매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히르카노스 2세를 조종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0년 동방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폅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 크라수스가 죽은 후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입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했지요.
이때 안티파테르는 히르카노스 2세에게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카이사르 편에 서게 합니다. 승패가 기운 것을 직감한 안티파테르는 유다 군대를 보내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을 도와 기원전 47년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좌에 올리는 데 힘을 보탭니다. 안티파테르는 그 공로로 ‘유다 총독’이 됩니다.
로마의 1인 통치자가 된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암살당하자 그 빈틈을 이용해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노스가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기원전 43년 안티파테르가 독살당하자 아들 헤로데가 발 빠르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차지합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권력을 차지한 그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손녀인 마리암네와 약혼해 하스모네아 왕가와 인척이 됩니다.
그런 후 로마로 달려가 필리피 전쟁에서 승리해 동방 지배권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의 지지를 얻어냅니다. 안토니우스는 헤로데의 형 파사엘과 헤로데에게 유다와 갈릴래아 영주로, 히르카노스 2세를 예루살렘의 대사제로 임명합니다.
기원전 40년 로마 제국과 경계를 이루던 파르티아 왕국이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점령합니다. 이 틈을 타 안티고노스는 예루살렘을 되찾지요. 헤로데는 잽싸게 피신했으나 파사엘과 히르카노스 2세는 체포됩니다.
유다 임금이 된 안티고노스는 큰 아버지인 히르카노스 2세의 귀를 자른 다음 파르티아 왕국에 포로로 넘깁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파사엘은 감옥에서 자살합니다.
마사다로 피신했던 헤로데는 다시 로마로 건너가 안토니우스에게 안티고노스를 고발하고, 자신의 약혼녀 동생인 아리스토불로스 3세가 유다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호소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을 설득해 기원전 40년 헤로데를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로마가 벌이는 파르티아인들과의 전쟁에 유다 왕국이 참전하라고 헤로데에게 명합니다.
기원전 39년 팔레스티나로 돌아온 헤로데는 로마군과 연합해 반로마 독립주의자들을 진압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37년 헤로데는 로마 제11군단과 6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석 달간 포위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대살육을 벌였습니다.
이때 안티고노스도 참수됐습니다. 이 일로 유다 왕국은 로마의 보호령이 됐고, 유다인들은 헤로데를 ‘로마인의 노예 이두매아인’이라고 능멸했습니다.
헤로데는 유다 왕국을 정략적으로 통치했습니다. 헤로데는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종’이라 불릴 정도로 입안의 혀처럼 굴었지요. 로마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과도한 세금 징수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또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로 재건하고 지중해변에 ‘카이사리아’ 항구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 안토니오 요새를 지어 로마군을 주둔시켰지요.
유다인에겐 당근과 채찍을 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개축합니다. 또 해마다 유다교의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헤로데는 대사제직 만큼은 탐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유다인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명망이 부족하고 영향력이 없는 사제 가문에서 대사제를 골라 임명했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은 헤로데를 능멸했으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유다인들은 헤로데를 ‘대왕’이라 부르며 지지했습니다.
헤로데는 무자비한 통치자였습니다. 그의 잔혹함은 혈통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는 늘 마카베오, 곧 하스모네아 집안을 경계하고 미워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마리암네와 그녀가 낳은 자기 자식들, 그리고 처남인 아리스토불로스 3세를 살해했습니다.
수백 명의 바리사이를 교수형에 처했고, 300여 명의 사관을 사마리아에서 반역을 꾸몄다는 이유로 처형했습니다. 헤로데는 언제 어디서 암살자들이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 11개 전략 요충지에 요새를 지어 도피처로 사용했습니다.
잔혹한 헤로데의 이런 모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헤로데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33년간 유다인의 왕으로 팔레스티나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고름과 구더기가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병에 걸려 고생하다 기원전 4년에 죽었습니다.
리길재 기자(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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