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목자들, 사랑과 자비 베풀며 변화와 쇄신 지향하는가
사목이란 섬기고 봉사하는 것
신자와 소통하고 상호 협력하며
열린 태도로 겸손하게 살아가야
■ 호칭과 정체성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었지만, 서품 30주년이다. 물론 나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사제로 살아온 선배들도 많다. 고작 30년을 사제로 살아와 놓고 사제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죽는 날까지도 사제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늙은 나이에 이르러보니, 자주 묻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 속에서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제품을 받은 날 신자들이 나에게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 사람들이 이제 나를 신부라고 부르는구나. 이제 나의 호칭적 정체성은 신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그 당시의 느낌은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부(神父), 과연 나는 사람들의 영적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가. 가부장적 생각일 수도 있지만, 건강한 의미에서 세상의 아버지들처럼, 나는 교회 안에서 책임과 자기희생의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나는 신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는가.
직무적 맥락에서 우리는 성직자, 사제, 사목자로 불린다.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성사와 전례에서 제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신자들을 돌보는 사람. 호칭은 흔히 정체성을 드러낸다.
성직자라는 말은 종교적 직무를 총칭하는 것이다. 신부라는 호칭은 일종의 지위와 태도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직무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호칭은 아마도 사제와 사목자일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 신부는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제관이며, 신자들을 돌보는 사목자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 사제라는 명칭은 신부의 존재적 정체성을, 사목자라는 명칭은 신부의 직무적 정체성을 표현한다.
신부, 사제, 사목자. 어떤 호칭으로 불리든, 그 호칭이 품고 있는 무게와 책임이 엄청나다는 것을 요즘 가끔 느낀다. 과연 우리는, 아니 나는 그 호칭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 그리스도의 삼중직 수행으로서 사목
신부는 교회 공동체에서 사목자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목이란 무엇일까? 사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직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사목 직무 수행은 권위를 갖고 복음을 선포하고, “정규적이고 효과적인 분배를 규정한 성사들을 통하여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고, “조언과 권고와 모범으로 또한 권위와 거룩한 권력으로 다스리는” 일이다.(「교회헌장」 25~27항)
「교회헌장」의 이러한 정의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현 교황청 복음화부)에서 발간한 「교구 사제 사목 지침」에서 상세하게 설명된다.
사목은 먼저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언직 수행으로서 사목은 세례받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복음 메시지의 선포, 설교와 강론을 통한 말씀의 봉사, 교리교육에 참여,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
사제직 수행으로서 사목은 전례 거행과 성사 집전을 통해 드러난다. 왕직 수행으로서 사목은 다양한 차원을 포함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선택하는 것, 세상에 복음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적용하고 실천하는 신자들을 도와주는 것, 신자들 사이의 협력을 조정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것, 문화의 복음화에 헌신하는 것,
젊은이들의 벗이요 인도자가 되는 것, 성소의 증진자가 되는 것, 신자들을 배려하는 것, 가정 사도직을 활성화하는 것, 병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것, 일치 운동의 촉진자가 되는 것, 비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목자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과 임무는 다양하고 막중하다.
■ 사목에 대한 확장된 이해
교회의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무와 연결된다.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은 참여 방식의 다양성과 차이를 뜻할 뿐이다. 물론, 사목은 직무 사제직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사제에게만 고유하고 단일한 의미에서 ‘사목자’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실제로 ‘사목’의 속성은 주교 직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 28항)
하지만 오늘날 사목이라는 개념을 그리스도의 삼중직 수행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단순히 사목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사목은 성직자와 신자의 상호 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사목은 성직자와 신자의 소통과 상호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목은 그 시작부터 시노달리타스적이라는 뜻이다.
사목 행위 안에는 통치와 관리와 운영의 측면과 봉사와 헌신과 섬김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목하다’는 동사의 의미는 ‘돌보다’, ‘보살피다’, ‘안내하다’, ‘봉사하다’, ‘헌신하다’, ‘섬기다’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교회 현실에서 ‘다스리다’, ‘통치하다’, ‘관리하다’, ‘운영하다’는 권위적 맥락으로 더 많이 작동된다.
왕직에 대한 오해가 낳은 편견이다. 왕은 종말론적 의미다. 실제 삶에서는 언제나 종의 모습이다. 사목자의 권위는 통치와 지배에서가 아니라 봉사와 헌신에서 나온다.
‘사목적’이 된다는 것은 완고한 이념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목적’이라는 말은 판단하고 규정하고 심판하는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과 자비의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목적’이라는 형용사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의미이며, 변화와 쇄신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의 사목자들은 과연 ‘사목적’인가?
■ 반성과 성찰
혹시 오늘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제관의 역할 수행과 통치와 운영으로서의 사목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즉, 사제직과 좁은 의미의 왕직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닌지. 예언직 수행과 진정한 사목직(왕직) 수행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예언자로서 사제를 생각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예언자는 교육자에 가까울 것이다. 사제는 신자들의 영적 양성과 신앙 교육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다.
물론 사제가 살아가는 자리의 핵심은 성체성사, 즉 전례의 공간이다. 하지만 신앙 교육과 양성의 영역,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 역시 중요하다.
사제는 말 그대로 제관이지만 동시에 교육자이며 사목자다. 사제는 전례와 성사에서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목의 현장에서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교육자와 사목자로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의 사제들은 과연 얼마나 공부하며 살고 있는가.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들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부재를 자주 느낀다.
공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투적이고 관행적 사유와 실천에 머무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직시하며 사목 현장을 섬세하게 읽고 신앙 교육의 방식과 태도에 관해 성찰하고 공부하는 사제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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