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나무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의 참 행복을 제시하시며 무엇을 바라셨을까요?
과연 이같은 물음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극적 의식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소위 복지문화 속에 깊이 잠겨 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중대한 책임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적어도 분명히 알고 깨달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 모임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도는 모든 것을 처분해야 합니까?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습니까? 사치스런 관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합니까? 대답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결의론(決疑論)에 빠져들기도 하고, 말잔치로 느껴지기도 하고, 모든 것을 뒤엎고자 하는 광신자의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만족도 평화도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열매가 열려야 할 나무를 돌보지 않고 열매를 얻으려 합니다.
가난, 프란치스코의 아름다운 신부인 신성한 가난은 잘 익은 달콤한 열매이지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단맛의 집합체인 나무, 즉 사랑의 나무 위에 열리는 달콤한 열매입니다.
그 사랑의 나무는 사회정의의 나무가 아닙니다. (종종 그렇기도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 인류애의 나무도 아니며 더 나아가 자신이 남보다 훌륭하고 관대한 사람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의
교만한 증거의 나무는 더 더욱 아닙니다. 사랑의 나무는 사랑의 나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복음적 가난을 깨닫고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가난은 '불완전한 상태' 로서 참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가난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사랑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을 나와 같다고, 나와 동등하다고 느낄 때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을 참되고 진실한 무상적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터득하게 된다면 그 사랑은 나를 아주 멀고도 먼 곳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 보이지 않는 춤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