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자 료 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39)에즈라기

dariaofs 2023. 9. 25. 00:31

유배자들이 귀향해 첫째로 한 일은 성전 재건

 

에즈라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유다인들의 유배로 중단됐던 경신례를 회복해 예전처럼 펼쳐지는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를 선포한다.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배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단을 쌓고 경신례를 드리고 있다. 스톤로그 캡처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본디 히브리어 정경에서 ‘에즈라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 책이었습니다. 또 히브리어 정경은 ‘에즈라 느헤미야’를 ‘성문서’로 분류돼 역대기 앞에 배열했습니다.

 

에즈라는 ‘돕다’, ‘협조하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동사 ‘아자르’에서 파생된 단어로 우리말로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에즈라는 사제이며 율법학자인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합니다.

헬라어 성경 「칠십인역」은 ‘Εσδρα ΑㆍB’(에스드라스 알파ㆍ베타)로 나눴습니다. ‘Εσδρα Α’는 기원전 2세기 역대기 하권에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헬라어로 엮은 에즈라기입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Εσδρα Α’를 ‘제3 에즈라기’라 해 구약 성경 외경으로 분류합니다. ‘Εσδρα B’는 히브리어 성경의 ‘에즈라 느헤미야’를 헬라어로 옮긴 책입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Esdras’(에스드라스)와 ‘Nehemias’(네헤미아스)로 나눕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가톨릭 「성경」은 불가타 성경의 분류에 따라 ‘에즈라기’, ‘느헤미야기’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계 역사서로 분류해 역대기 다음으로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에즈라기는 유다인들이 기원전 538년에 바빌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뒤 한 세기가 넘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바빌론 포로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이 고국으로 귀향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는 에즈라 사제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즈라기의 저자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표기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역대기 상ㆍ하권과 에즈라기, 느헤미야기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역사를 한 저자가 편집, 구성했다고 봅니다.

 

역대기 하권의 마지막 두 절(2역대 36,22-23)과 에즈라기의 첫 장 세 절이(에즈 1,1-3)이 같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에즈라기는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기원전 3세기 중엽 사이에 완성됐다고 봅니다.

 

대략 기원전 330~기원전 250년 사이라고 추정합니다.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귀향한 후 쓰인 것이죠. 에즈라기는 아람어로 작성된 일부 내용(에즈 4,8─6,18; 7,12-26) 외에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돼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 팔레스티나에는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공용됐기 때문입니다. 아람어는 페르시아의 공식 언어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유다인들도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에즈라기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귀환과 성전 재건’(에즈 1─6장), ‘공동체 재정비’(에즈 7─10장)입니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임금은 칙령을 반포해 유다인들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당시 유다는 왕국이 아니라 조그마한 지방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배자들은 점령지 관리들과 유다교 반대자들의 갖은 횡포를 이겨내고 제일 먼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빌론 포로생활 동안 중단됐던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경건하게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 사업을 착수합니다. 그렇게 공사를 한 지 20여 년이 지난 뒤 페르시아 다리우스 임금 통치 아래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때에 마침내 성전 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에즈 1─6장)

바빌론 유배자들의 첫 귀향이 있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 페르시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으로부터 공적 임무를 받은 사제이며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혼인으로 유다교 전통과 율법에 어긋나는 여러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슬퍼합니다. 그래서 에즈라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개혁을 단행합니다.

 

에즈라는 유다인과 결혼한 이민족 여자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을 유다 지방 경계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리고 에즈라는 바빌론에서 가져온 모세의 율법서에 따라 축일과 경신례를 복원합니다.(에즈 7─10장)

에즈라기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성전, 예루살렘,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에즈라기는 포로생활에서 귀향한 유배자들의 새로운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닙니다.

 

에즈라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유다인들의 유배로 중단됐던 경신례를 회복해 예전처럼 펼쳐지는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를 선포합니다.

 

그래서 에즈라기는 예루살렘 성전 복구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배자들의 첫 번째 사명이자 과제였다고 합니다. 또 키루스 임금이 칙령에서 명령한 이 성전의 재건축이 바로 귀향의 목적이었다고 합니다.(에즈 2장)

 

에즈라기는 성전이 완공돼 봉헌된 것은 인간의 작품이 아닌 하느님의 작품이라며 기뻐합니다.(에즈 6,22) 그리고 유다교 율법 준수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근본 바탕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에즈라가 강조한 율법 준수는 오늘날의 ‘근본주의’와는 다릅니다. 에즈라와 당시 귀향한 유다인들이 실천한 율법은 항상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 참된 경신례와 자발적 기도로써 찾을 수 있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즈라와 하느님의 백성들은 고정된 율법에만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에즈 3,11; 6,21-22; 7,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