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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김진규 마르티노 (하)

dariaofs 2023. 12. 31. 00:41

고뇌와 사색 표현할 줄 아는 배우…1960년대는 ‘김진규의 시대’였다

 

한국 영화사 최고 걸작 ‘오발탄’서 명연기

 

김진규. 출처 =「한국영화100년100경」


신상옥 감독과 찍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베니스 영화제·아카데미상 첫 출품
‘벙어리 삼룡’  배역 몰입하려 귀 막고 생활
亞 영화제 남우주연상 등 연이어 수상 



주연 영화 작품성·흥행 모두 성공

결혼 이듬해에 김진규(金振奎 1923~1998 마르티노)가 촬영한 작품은 무려 22편이나 되었다. 그중에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한국 영화사에서 길이 빛나는 명작이다.

 

특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특별한 영화가 있다. 바로 ‘벙어리 三龍(삼룡)’이다. 신상옥이 감독하고 김진규와 최은희가 열연한 영화다. 나도향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라 흥행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히트했다. 김진규는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집에 오면 김보애를 업어 주곤 했다.

 

각본에 아씨를 업고 달리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집에 오면 솜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말 못하는 사람의 흉내를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역까지 나가 말 못하는 흉내를 냈다.

그러던 어느 날, 촬영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상하게도 끙끙 앓았다. 촬영할 때 아씨를 둘러업고 뛰는 장면이 너무 힘들었던 것. 아씨 남편 역을 맡은 박노식에게 장작으로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이런 고생 덕에 이 작품은 작품성과 흥행 면에서 모두 성공했다.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큰상을 받았고, 김진규는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김진규는 ‘오발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한국영화사를 빛낸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들.



또한 김진규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범선 원작)과 ‘카인의 후예’(황순원 원작)에 출연하면서 문예영화 전문 배우가 되었다.

 

특히 ‘카인의 후예’는 해방 후 북한에서 벌어진 공산화 과정을 다룬 영화인데, 김진규는 지주의 아들로 나오고, 박노식은 지주네 소작농을 관리하는 영감으로 나왔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그 영화를 보았다. 김진규의 그 어질고 착한 모습과 반대로 박노식의 그 악마 같은 표정과 쇳소리 나는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마침 나는 학교에서 나눠준 구충제 산토닌을 먹고 어지러워 얼굴이 노래진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실이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 같았다.

또한 김진규가 감독을 맡은 작품이 있다. ‘종자돈’이다. 신영균(황소를 가진 홀아비)과 김보애(암소 한 마리로 종잣돈을 마련하려는 과부)가 주인공을 맡았다. ‘종자돈’에서 주요 소재는 ‘소’였다.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상징도 ‘소’였다.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졌다. ‘종자돈’은 공화당 당원이면 필히 봐야 하는 영화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그 영화를 보았다. 대통령이 김진규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까지 했다.

 

그 덕에 ‘종자돈’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유현목 감독은 김진규를 이렇게 회고했다. “김진규는 드물게도 고뇌하고 사색하는 모습이 어울리는 배우야. 더 나아가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지. 그래서 내가 그 사람과 가장 많이 일했던 것이야.”

 

김진규·김보애 부부와 딸 김진아. 출처 =「내 운명의 별 김진규」


직접 제작한 반일 영화 잇따른 흥행 실패

김진규는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자신이 가진 돈과 살던 집, 그리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까지 모두 합쳐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가 ‘성웅 이순신’이다. 김진규는 일본과 관련된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관여했다.

 

대표적으로 ‘독립협회와 이승만’, ‘사명당’,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요화 배정자’, ‘일본 천황과 폭탄 의사’, ‘성웅 이순신’, ‘의사 안중근’, ‘서산대사’, ‘유관순’, ‘난중일기’ 등이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설움과 고통을 받았기에 일본에 대한 반항심과 적개심이 컸다. ‘성웅 이순신’도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화 제작을 도와주었다.

 

관객도 10만 명이나 왔다. 그런데 흥행에는 실패했다. 결국 김진규는 ‘성웅 이순신’으로 파산했다.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김보애와 이혼까지 했다.

그런데 6년 후에 김진규는 또다시 ‘난중일기’를 제작했다. 그 영화에서도 이순신 역은 자신이 맡았다. 그리고 친한 사람들(박암, 장동휘, 장혁, 황해, 이대엽, 이낙훈, 하명중, 정애란, 태현실 등)을 배우로 출연시켰다. 두 아들도 출연시켰다.

 

‘난중일기’ 역시 흥행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대종상에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진규를 청와대로 불렀다. 대통령은 화랑 정신이 들어간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김진규는 기대와 희망을 갖고 대본 작업과 현장 답사, 전문가 고증을 받아가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26 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랑 영화 제작은 시작도 못 하고 끝이 났다.

 

 딸 김진아는 아버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드라마와 뮤지컬 등에 출연했다.

 


파산… 골수암 투병… 주님 품으로

김진규는 영화와 손을 끊고 제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터를 잡았다. 88올림픽 때는 제주 성화 봉송 주자로 달렸다. 미스코리아 선발 때는 제주 지역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문화계 원로로 봉사활동도 했다.

 

김진규는 서울에서 살던 집을 처분해 제주에 땅을 사 가족호텔을 지었다. 그런데 호텔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채 압박이 커지면서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술로 세월을 보냈다. 건강이 나빠졌다. 딸 김진아가 아버지를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모시고 가 진단을 받았다. 골수암이었다. 눈도 나빠져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때부터 김진규는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했다.

김진아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어머니가 하던 음식점을 다시 시작했고, 뮤지컬과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어느 날, 김진규의 한쪽 팔이 심하게 부어올랐다.

 

담당 의사가 오더니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임종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제주에서 한 신부님이 올라왔다.

 

바로 그 신부님이 김진규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을 갖게 한 신부님이었다. 신부님은 김진규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티노 할아버지, 이제는 하느님의 나라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김진규는 입원하기 전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마르티노였다.

필자는 김진규가 어떻게 해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았다. 일간지를 비롯해 가톨릭신문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제주 신문사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필자가 유추했다. 1960년대는 ‘김진규의 시대’였다. 인기 절정이었다. 늘 선한 역과 지식인 역을 맡았다. 그래서 많은 여성 팬이 있었다. 그중에 일본에서 공부한 국문과 여교수가 있었다. 시가 전공이었다.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가까워졌다. 김진규는 여교수를 만나면서 시집을 들고 다녔다. 그 여교수는 가톨릭 신자였다. 김진규에게 성모상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면서 가톨릭 신앙을 가지라고 권유했다.

 

그게 아니면 김진규가 ‘포화 속의 십자가’, ‘순교자’, ‘원죄’ 등 수백 편의 영화에서 각기 다른 역을 하면서 가톨릭 신앙과 만났을 것이다.

 

거기서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제주에서 그 신부님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후 김진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족이 가도 말도 하지 않고 천정만 바라보았다. 식사도 하지 않았다. 검버섯이 손과 얼굴에 번져갔다.

 

결국 김진규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아내 김보애는 김진규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분장 케이스를 들고서 영화 촬영이라도 가듯 언제나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 한번 흔들어 주지 않고 소리 없이 떠났다.”

참고자료 : ▲김보애 「내 운명의 별 김진규」 21세기북스. 2009 ▲가톨릭평화신문(2001.9.24) ‘사랑으로 사는 사람 될래요’(호스피스 봉사활동 영화배우 김진아씨) ▲가톨릭신문(2006.12.24) ‘입양 홍보대사 김진아 씨’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국영화 100년 100경」 돌베개.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