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고 떠오르는 시간의 경계, 대림절은 그런 시기다. 달력은 한 장이 남아 있는데, 전례력으로는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한편, 기다림 속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책과 후회는 나를 과거에 붙잡아두고, 새로 올 시간조차 과거의 바람에 맞춰 재단케 한다.
하지만 잘못한 것들만 이행(移行)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찬란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더 질긴 올무가 되기도 한다.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효력을 잃은 말들이 주문처럼 맴돈다.
대림절을 표현하기 적절한 단어가 떠오른다. 리미널리티(liminality). 임계성, 역차성, 사이성 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전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문지방(threshold)을 뜻하는 라틴어 ‘리멘(limen)’에서 파생했다.
문화사회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정교화한 이 개념은 패러다임이 교체되는 중간 단계, 즉 이전의 것이 분해되고 새로운 관점이 들어오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모호성 또는 방향감각의 상실을 일컫는 단어다.
문지방은 집의 내부와 외부, 방과 방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다. 리미널리티는 문지방같이 어느 공간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이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개인적 규정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나는 자유로운 시간인 동시에, 이제껏 나를 지탱해 온 소속감과 정체성이 무너져 취약해지는 시간이다.
함부로 오갈 수 없는 금기의 시간인 동시에,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신성한 시간이다.
문학 작품에서 리미널리티를 표현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은유는 광야, 유배, 무덤 등이다. 고단함과 두려움, 외로움과 상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전의 나를 놓아버리는 상징적 ‘죽음’을 거쳐야만 새로운 나를 만난다는 뜻이다. 그 계기는 우연을 가장한 은총이다. 연속성이라는 시간의 법칙(Chronos)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Kairos)가 들어오는 사건.
그리하여 나의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과 만나고, 비로소 새로운 나를 향한 이행이 가능해지는 사건. 그러기에 은총은 그저 잘못된 것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운 과거를 회복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질서가 전복되는 사건이다. 나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은총은 하느님의 일이다. 내가 작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은총이 들어오는 틈새는 언제나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은총은 또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행색을 하고 있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말구유에 누운 핏덩이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별을 따라와 베들레헴 낡은 축사에 멈춘 동방의 현자들처럼, 세상의 것과는 다른 방향감각을 가져야 은총이 들어오는 틈새를 식별할 수 있다. 그 앞에 고개 숙이고 마음을 열 수 있다.
과거에 갇혀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비단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집단과 사회와 국가에서도, 갈등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은 대부분 갖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영화로웠던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멀리 십자군 전쟁부터 근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미련과 집착이 인간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보라.
그 포화 속으로 올해도 연약한 생명 아기 예수가 오고 있다. 2000년 전 그랬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그곳, 빼앗기고 억눌린 사람들의 삶 속으로, 올해도 오고 있다. 우리는 그를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 내 마음에는 그가 누워 쉴 말구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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