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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야기] (26-끝)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dariaofs 2013. 10. 9. 20:20

                                                                                                                                           평화신문  2011. 12. 11발행 [1145호]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작성자 : 조규만 주교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 눈높이에 맞춰 당신 자신을 알려주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온 세상과 인간을 직접 창조하신 창세기의 하느님,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용기를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능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의 성령,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 될 만큼 친교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에 관해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믿는 하느님을 이야기할 차례다.

 철들 무렵부터 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 때는 모두 다 그런 줄 알았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3㎞쯤 떨어진 학교에 버스를 타고 가고, 없는 집 아이들은 걸어서 가는 것 차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어야 했던 그 시절의 운동이 오늘날 나의 건강을 가져다 주었다고 확신한다.

 나의 부모님은 사회적으로 유명한 분도, 이렇다할 명함을 내세울 분도 아니다. 농담으로 우리가 거저받은 것을 선택할 수 없다고, 부모님을 거저 받았기에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지금의 부모님을 사랑한다.

 

아버지는 국방경비대 시절 입대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전투에 참가하고 오늘의 이 나라를 위해 고생하며 살았던 그야말로 민초 서민이다.


내가 아닌 주님께서 선택

 사제수품 25주년 때 부모님께 세 가지 감사를 드린 적이 있다.

 

첫째로 건강히 살아계심에 감사드렸다. 두 분이 편찮으셨다면 마음이 꽤 많이 쓰였을 것이다. 잘 해드리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둘째, 두 분이 많이 싸우셨지만 아직 이혼하지 않고 함께 해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많은 부부들의 이혼을 보면서 두 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셋째로 많은 형제들을 낳아주신 것에 감사드렸다. 부모님도 동생들도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 하느님께 고마운 마음뿐이다.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것도 내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 말씀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었다.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이지,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주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본당 신부님께서 부활 판공으로 공소에 오셨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조퇴해 집으로 돌아와 판공을 맞았다. 찰고 때 신부님은 나에게 신부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시험 때 후임으로 오신 본당 신부님이 연락을 하셨다. (소)신학교에 가겠다는 사람이 아직 왜 입학원서를 내지 않았냐는 것이다. 본당 신부님께 신부가 되겠다고 대답한 것밖에 없었는데, 내가 신학교 지원자로 인수인계가 됐던 것이다.

 

부랴부랴 신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돌이켜 보면 본당 신부님을 통해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어려서 군부대 주변에서 자란 때문인지 군종신부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국군창설 때부터 군에 계셨고 지리산 토벌작전, 여순반란사건, 제주도 공비 토벌작전, 6ㆍ25, 모든 전투에 참여한 요즘 말하는 국가 유공자시다. 하지만 하느님 뜻은 군종신부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훗날 나는 하느님께서 군종보다 공부하는게 더 좋다고 판단하셨다고 믿게 됐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셨다.

 

나는 유학이라는 걸 꿈꿔 본 적이 없었지만 로마로 유학가서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게 됐다. 사제로 살아가는 데는 그것이 훨씬 도움이 됐음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사제가 되는 은총을 허락하셨다. 지난 '사제의 해'에 교황님께서는 요한 비안네 성인의 말씀을 빌어 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사제란 얼마나 위대합니까? 사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죽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제의 말을 따릅니다. 사제의 말을 따라 주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작은 성체 안에 머무십니다. 성품성사가 없다면 아무도 주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누가 주님을 감실 안에 모십니까? 사제입니다… 하느님 다음에는 사제가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제의 신원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사제가 없다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도 소용없습니다. 지상에서 구원사업을 계속하는 이는 사제입니다."(사제의 신원 중, 성 요한 비안네 신부)


하느님의 크신 사랑

 요즘 하느님 생각을 하면 가끔 울컥 눈물이 난다. 주님 사랑을 깨닫고 증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크신 사랑,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 알고 보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그 크신 사랑을 온전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 수가 없다. 아마 죽을 무렵에나 깨달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동안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된 것보다 아직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느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신비 그 자체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이해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기를 원하는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는가? 하느님도 분명 그러하실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