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
모든 계명의 중심인 이웃 사랑
"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이 말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인가 하는 뜻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말할 것도 없이 "그래서는 안 된다."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이웃 사랑'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웃 사랑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신자로서 닦아야 할 여러 가지 덕행 중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계명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중심적인 계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이 한마디 말씀에 요약됩니다."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요한복음 13장 34-38절에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결코 여러 계명의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계명의 중심이요 완성이며 그 전부입니다. 이 이웃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과 대립될 수도 없고, 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핑계 삼아 면제될 수도 없습니다. 이만큼 이웃 사랑은 믿는 이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어떤 율법학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과 답에서 생명과 사랑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세상 어떤 것으로도 얻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본시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기쁨도 의미도 없는 메마른 삶입니다. 참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지녀야 할 근본 자세이며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 역시 바로 사랑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도 인간 상호간의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오는 존경, 상호 신뢰, 용서, 화해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한 사제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고, 사제족에 속하는 레위 사람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나 제사를 드리고 예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같이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서도 그를 돌보아 주어야겠다는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나 레위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전심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마르 12, 33 참조).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바치고 제사를 바쳐도 그와 같은 예배 속에 담긴 정신,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야고보 서간에 보면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좋은 언변도 어떤 깊은 신학 지식도 산을 옮기는 큰 믿음도 심지어 큰 자선 행위나 영웅적 행위까지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미사 성제를 열심히 봉헌하지만 이 비유의 사제와 레위와 같이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반성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 입은 사람을 현재의 곤경에서 구해 줄 뿐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도 걱정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참된 크리스천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시사요 그 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성당에 잘 다니는 신자일지라도 또는 사제나 수도자일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런 신분, 그런 위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냐에 대한 근본 문제 제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비할 데 없이 큰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처지를 자랑해도 좋고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일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든지, 더욱이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위선이요,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교회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참으로 이웃 사랑을 증거하고 있느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얼을 받아야
우리 서로간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 모두의 삶이, 한국 교회의 삶이 내적으로 이웃 사랑에 충만 되어 있다면, 그 마음이 열려 있다면,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면,
함께 아파할 줄 안다면 그리하여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종교나 신념에 관계없이 이 교회에서만은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보호를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교회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이 나라 안에 있어서 누룩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며 세상의 빛으로 빛날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 신자요 교회인 우리의 사명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써 이 땅의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남을 중심으로 할 때 참사랑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남을 위하면서도 자신을 앞세우기 쉬운 데 비해서, 남이 중심인 사랑은 진실로 봉사적이요 헌신적이요 몰아적인 사랑입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조건 없이 내주는 사랑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에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이웃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병고, 소외와 천시에 우는 이웃을 버리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하느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엔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 나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 36)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로마 5, 5). 이렇게 성령, 하느님의 얼을 받아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실천과 아울러 겸손되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얼, 성령 앞에 여는 것입니다. (1980. 3. 22. 명동 대성당, 사순절특강)
四旬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고 시험받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새기기 위하여, 단식, 속죄를 행하도록 규정한 교회력. 일요일을 뺀 부활제 전40일 동안으로 카톨릭에서는 ‘봉재(封齋)'라 하던 것을 1968년 이 용어로 바꾸었다. 올해 사순절은 3월 5일(수)부터 시작된다.
김정호 기자 (매일종교신문)
' 세 계 교 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 “만인의 얼굴에서 하느님 얼굴 발견하는 복음 선포자” (0) | 2014.03.18 |
---|---|
[한국교회] 강우일 주교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 (0) | 2014.03.17 |
[뉴스종합] 불교, 가톨릭, 죽음 이후 문제 의식 담은 역저 동시 출간 (0) | 2014.03.15 |
[신학과 영성] -이웃종교- 티벳의 혼, 총이 없어도 강한 진실의 힘 (0) | 2014.03.15 |
[세계교회] "한국교회여, 일어나 비추어라" (0) | 2014.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