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흥 동 성 당

본당의 발자취

dariaofs 2011. 1. 24. 17:39

대전교구 주교좌 본당의 설립과 초기 현황

대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913년 이전이었다. 이 공동체는 옥천 본당의 제 2대 주임 이종순 (요셉)신부가 1913년에 성탄때 대전 신자들의 방문을 받음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본래 옥천 본당은 공주 본당의 공소로 있다가 1906년 옥천 ㆍ보은 ㆍ영동지역과 장호원(현 갑곡)본당 관할이던 괴산ㆍ청주ㆍ연기의 일부 지역을 분할 받아 설립되었으며, 1914년 비룡(현 충북 청원군 남이면 비룡리)의 본당으로 이전할 때까지 두 명의 한국인 신부를 본당 신부로 맞이하였다.



초대는 홍병철(루가)신부였고, 2대는 바로 이종순 신부였다. 이종순 신부는 대전의 신자 공동체를 알게되자마자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대전 지역에 공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대전의 신자들은 이 신부의 의견에 따라 1915년 가을에 공소 집을 마련함으로써 대전 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대전 공소의 신자들은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신자수는 1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1916년에는 85명, 1917년에는 105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옥천본당이 비룡본당으로 이전된 지 얼마 안되어 이 신부는 다시 대전으로 본당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1919년 초부터 9천여 평가량 되는 대지를 매입하였다.


그리고 1919년 11월 12일, 마침내 대전으로 이전함으로써 '대전본당'을 설립하였으며 이에 따라 옥천과 비룡은 대전 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

     


 


     

이종순 신부가 정착한 곳은 대전군 외남면 방축리 생곡(현 대전시 목동)마을 이었다.
그는 이전 후 이미 매입해 놓은 대지 안에 있던 한옥을 임시 거처로 삼았는데,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던 집은 사제관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1920년 초부터 성당 10칸 사무실 6칸, 거실 4칸의 규모로 건축을 시작하여 5월 이전에 완공하고, 그에 딸린 거실로 사제관을 이전하였다.


당시 대전 본당의 관할 구역은 대전을 비롯하여 충남 대덕군, 연기군, 충북의 청주, 영동군, 보은군, 옥천군, 괴산군 일원으로, 1920년의 신자수는 1,512명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충북 괴산에 고마리 본당이 설립되고 괴산군ㆍ보은군ㆍ청주 일대가 새 본당으로 이관되면서 1921년 신자수가 829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는 918명으로 약간 증가하였다.


이 해 대전 시내 지역만의 신자수는 약 40여명이었다. 이어 이 신부는 1921년에 사제관을 신축하고, 1923년부터는 성당을 대전 시내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이신부가 1925년 6월 27일 강원도 평강의 솔모루 본당으로 전임되어서 미루어졌다

 


성장과 변모

이종순 신부에 이어 대전 본당의 제 2 대 주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 교수로 있던 루블레(헨리코)신부였다. 그는 본당 부임 이듬해, 기존의 작은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새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 1927년 3월에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앓아 온 지병이 있었으므로 이 해 10월 30일에 상해로 건너가 병을 치료하던 중 이듬해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부여 본당의 보좌로 있던 김인상(야고보) 신부가 임시로 신자들을 돌보다가 1927년에 폴리(데시데리오) 신부가 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30년에 그가 수원 본당으로 이임하면서 박일규(안드레아)신부가 제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본당 주임은 5대 콜라르, 6대 멜리장 신부가 잠시 동안 맡았는데, 1937년 9월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대전에 진출하면서 대흥동과 본당 이웃의 목동 부지를 매입하였다.


1939년 제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코르미에 신부는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에 의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대신 김유룡(필립보)신부가 제 8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코르미에 신부는 해방 후 석방되었다.


본당이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1944년 12월에 제 9대 주임으로 오기선(요셉)신부가 부임하면서였다.


그는 우선 해방 후인 1945년 10월 초,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협의하여 목동 성당을 수도회에 인계하는 대신 동 수도회에서 매입해 놓았던 대흥동의땅에 있던 임시 건물에 본당을 이전하였고 10월 7일자로 본당 주보를 '성녀 소화 데레사'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대전 본당은 '대흥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목동은 정식 본당이 아니라 수도회 소속의 준 본당으로 변모하였다.


목동 본당이 다시 정식 본당이 된 것은 1958년이었다. 오기선 신부는 이때부터 교리 경시 대회와 교리 강좌등을 통해 학생들의 신앙 생활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1947년 7월 9일에는 도(道)로부터 '충남 애육원'을 인수받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들은 초청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5월 8일, 충청남도 지역이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독립 포교지로 설정되었는데, 그 책임자로 임명된 라리보 주교가 본당 이웃에 있는 적산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거주하면서 대흥동 본당은 충청남도 포교의 중심 역할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6ㆍ25동란으로 인해 모든 활동이 일시 정지되기에 이르렀고, 특히 전란 중에 성당이 파괴되었으므로 수복 후에는 노천에서 미사를 드려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인 1950년 7월말에서 8월사이 서산 본당의 콜랭신부를 비롯하여 외국인 신부 9명과 홍성 본당의 강만수(요셉) 신부가 체포된 뒤 대전으로 옮겨져 이 가운데 7명이 9월 23일∼26일 사이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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