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열전

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1

dariaofs 2014. 4. 13. 02:30

 

인도와 일본 선교…“선교사에 대한 편견, 어떻게 극복했을까”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가 3월 13일부터 ‘한국 천주교회사 강의 I―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를 주제로 공개대학을 시작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6월 12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리는 공개대학의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해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 등으로 번져나갔던 그리스도교는 대체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이 먼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을 들고 찾아왔을까.

 

흔히 한국에서는 18세기 서학의 도입을,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그보다 앞선 16세기 선교를 떠올리지만, 아시아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은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양인성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3월 27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4세기경에 인도 남부에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시리아 그리스도인 400여 명이 인도의 서남부 크란가노르 지방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인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동 시리아 지역교회와 관계를 맺었고 5세기 후반에는 칼데아 교회의 총대주교가 인도에 주교를 파견했어요.”

 

양 연구원은 “인도가 로마나 유대와 고대부터 교역을 했고, 홍해나 페르시아 만의 항구에서 해상무역을 했기 때문에 복음이 일찍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지난 3월 27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양인성 연구원이 선교회의 아시아 선교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배선영 기자

 

가톨릭교회의 선교회가 적극적으로 인도 선교에 나선 것은 15세기 바스코 다 가마가 서양인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인도 항로를 개척한 뒤였다.

 

예수회를 중심으로 1542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1572년 카브랄 신부 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도 땅을 밟았다.

 

초기에는 토착화된 기존의 인도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와 갈등과 분열이 있었으나 1600년 이후에는 현지 적응에 힘을 쏟았다.

 

양 연구원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마두라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예수회 로베르토 데 노빌리 신부의 선교 활동을 사례로 들었다.

 

“당시 인도인들은 선교사나 포르투갈 상인들을 ‘술과 여자를 탐하고, 소고기를 먹으며, 잘 씻지 않아 몸에서 악취가 나는 불가촉천민’이라고 경멸했습니다.

 

노빌리 신부는 인도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선교가 불가능하다고 여겨 힌두교의 교리 체계에서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점을 모색했지요.”

 

양 연구원에 따르면 노빌리 신부는 당시 인도 언어인 타밀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인도의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인도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 계급인 브라만의 복장을 입으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브라만들이 사는 지역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노빌리 신부의 이러한 선교 방식은 예수회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고, 비그리스도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후 예수회는 이런 적응주의 정책에 따라 선교 활동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양 연구원은 설명했다.

 

양 연구원은 노빌리 신부의 선교 정책이 일본에서 활동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 Valignano, 1538~1606)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1579년 일본에 입국한 예수회의 발리냐노 신부는 선교사들에게 반드시 일본어를 배우도록 했고, 일본의 문화와 풍습을 인정하고 이에 그리스도 신앙을 적응하려 했다.

 

그의 이런 선교 정책은 <천주실의>의 저자로 유명한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의 지배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국가의 달성에 방해가 되는 교회를 경계해, 1587년 6월 19일자로 선교 활동을 금지시키는 ‘파테렌 추방령’을 선포합니다.

 

서양 성직자들의 일본 입국이 금지되었고, 예수회의 부지와 수도원이 몰수됐지요. 이에 포르투갈에 군인 파견을 요청해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주장을 편 선교사도 있었으나, 발리냐노 신부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1591년 발리냐노 신부는 히데요시와 회동을 했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이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면서 과격한 선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선교사들의 일본 활동을 막지 않겠다고 피력했다.

 

이 회동은 긍정적인 합의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를 완화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 연구원은 “교황 식스토 5세는 후나이에 일본 주교좌를 설정하고, 포르투갈의 예수회 관구장인 모랄레스 신부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으나

 

일본으로 오던 중 병사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마르틴스 주교가 임명됐다”는 설명으로 일본에서의 선교 활동에 대한 강의를 마쳤다.

 

지난 3월 13일 개강 미사로 시작한 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은 6월 5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열리며, 6월 12일에는 종강 미사와 수료식을 거행한다.

 

‘한국 천주교회사 강의 I―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라는 주제로, 지난주 아시아 선교를 다룬데 이어 3일부터는 조선과 천주교의 만남에 대해 본격적으로 강의할 예정이다.

 

배선영 기자(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