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7일 동시에 시성되었다. 지난해 7월 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첫 회칙 <신앙의 빛>을 발표하던 날 두 교황의 시성이 공식 승인되었던 것처럼, 이번 시성식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교황의 동시 시성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교회사적 전환’을 이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 교황은 1963년 6월 3일 선종한 뒤 37년 만에 시복되고, 50년 만에 시성된 셈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다른 시선을 품고 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5년 4월 2일 선종한 뒤 6년 1개월 만에 시복되고, 9년 만에 시성되었다.
이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엄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위해 해당자가 죽은 뒤 5년간 시복 절차를 추진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관례를 깨고 서둘러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 절차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교황의 동시 시성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신앙관의 절묘한 결합처럼 보인다.
|
 |
|
▲ 27일 오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성인품에 오르는 교황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초상화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 걸려 있다.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
제국교회와 갈릴래아적 신앙관 에라스무스 “교황, 권력 아닌 도덕적 권위 회복해야”
철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서구세계가 카이사르가 정복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을 때, 그리고 카이사르의 법률학자들이 편집한 서구신학의 텍스트를 받아들였을 때, 겸손을 모토로 하는 소박한 갈릴래아적 신앙관은 여러 시대에 거치면서 수그러들었다.
반면에 이집트와 페르샤 및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뿌리 깊은 맹목적 숭배는 계속 유지되었다. 교회는 오로지 카이사르에게만 속하는 속성들을 하느님께 갖다 붙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황제에게 속한 것을 교황에게 적용했다. 이를 두고 독일 신학자 칼 라너는 ‘제국교회’라 이름 붙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에서 ‘제국교회’적 관행과 시각에서 탈피해 갈릴래아의 예수를 닮은 소박한 교회로 가려는 교회개혁의 출발점이었다.
공의회 이전까지 교황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가 선언한 ‘교황의 무류권’을 지닌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 교황은 주교 임명권을 독점하고, 모든 권한은 바티칸에 집중되었다.
또한 가톨릭교회야말로 ‘완벽한 사회’라는 믿음으로 모든 세속제도와 종교제도의 수호자임을 강조하고, 앵무새처럼 교리문답을 되풀이하면서 성인숭배와 유물에 대한 의식주의(儀式主義)와 헌신을 강조했다. 결국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지배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떠나갔다.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는 성직자들이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권위적인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며, 교황직에서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황직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기를 앞질러 요청했다.
당시 교회는 공감보다 훈계를 좋아했던 심판자로서의 교회였다. 신학상의 사소한 문제를 꼬치꼬치 따지는 것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를 원했던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래되는 성령이 한 몸이신 성부나 성자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 두 분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벌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친절, 선량, 인내, 성실, 겸손, 절제, 순결 등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면서 공의회가 신학적인 토론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개막연설에서 “주교들은 이제 더 이상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예언자가 되지 말고 이 세상에 자비의 치료약을 제공하자”고 말함으로써,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는 상처 많은 세상에서 아픈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교회가 ‘철저히 세속적이면서도’ 짐짓 세상 문제에 무심한 듯이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거룩한 고립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요한 23세의 생각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지역교회의 자율성 옹호 공의회 영향으로 발생한 해방신학…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민중화
|
 |
|
▲ 교황 요한 23세 (사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보도자료) |
한편 요한 23세는 15세기의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 천명했던 것처럼, 초대 교회로 돌아가 교회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과 권한을 공유하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지역 주교들은 더 많은 자율성을 갖게 되었고, 평신도들은 교회의 일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라틴어는 토착어로 대체되었고, 종교적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었다.
또한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이 강조되었으며, 다른 종교 및 세상과 대화할 임무가 주어졌다.
이후 교회는 ‘세속권력으로부터 받은 특권들’을 원치 않으며, 교회의 정당한 권리들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복음적 신실성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면 거부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후 교황들은 교황의 대관식을 거부하고 ‘즉위미사’로 대체했으며, ‘짐’ ‘전하’ ‘각하’ 등 제국교회에서나 사용할만한 권위적인 용어들을 폐기해 나갔다.
물론 교황직은 ‘친교와 일치의 반석’으로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것으로 재확인되었지만, 몸체로서 주교들의 중요성이 재천명됨으로써 힘의 균형을 회복했다.
이는 바티칸 중심의 중앙집권적 태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고, 지역교회의 주교회의가 강조되고, 주교들의 정기적인 자문회의인 시노드를 신설했다.
공의회는 시노드가 입법 기능을 갖는 상임의회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유럽 교회 중심이었던 공의회에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교회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공의회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다.
미국 주교회의에서 평신도와의 협의는 관례화되었고, 금육과 연옥을 강조하던 이전 교회와 대조적으로 미국 교회는 무엇보다도 자비와 정의, 공동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공의회의 영향이 극적으로 표출된 곳은 라틴아메리카였다. 브라질, 칠레, 페루를 중심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온 힘을 쏟기로 결정했다.
주교들은 ‘제도화된 폭력’을 사회악이라고 비판하며, 종속이론에 기초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은 11년 뒤에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
교회가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제와 수녀와 교리교사들이 군사정부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새로운 순교에 이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강조하는 해방신학의 등장, 성경을 의식화 도구로 사용한 교육 방법 개발, 그리스도인으로서 증거행위를 통해 사회변혁을 꾀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기초공동체’가 건설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그 시기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출범해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다.
요한 바오로 2세, 보수적 교회론 지닌 따뜻한 인민주의자 “순종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
|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보도자료)
|
그러나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갑작스런 선종 이후 교황직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의 등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했다.
착좌 직후에 멕시코를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기꺼이 군중과 함께 노래하고 박수치고 춤추는 인민주의자의 모습을 지녔다.
교황은 쉴 새 없이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거리낌 없이 인권 옹호를 부르짖음으로써 교회 내 진보세력에게 투사로 추앙받았지만, 한편에선 사제들과 수녀들이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주교들에게 순명하라고 당부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회적 행동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권을 옹호했지만 교회 구성원의 권리는 부정했다.
적어도 그의 교회론은 공의회 이전의 ‘절대군주제로서의 교회모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 밖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교회 내 민주화를 추진했던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경험과 다른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모델은 폴란드 교회였고, 폴란드 교회는 공산정권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에게 교계제도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했고, 또 그러한 충성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만큼이나 다원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를 경멸했다. 그는 물질적 소유에 관심이 없고, 매우 영성적이며,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다.
지칠 줄 모르고 교회에 봉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적대적인 민족들도 방문했다. 이 점에서 그는 성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교회론은 ‘비민주적’이었다. 공의회에서 천명한 ‘일반사제직’인 평신도들에 의한 아래부터의 사제직은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구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황이 극히 경계하는 것이었다. 특히 여성사제직에 대한 논란은 그에게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이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로 복귀하는데 동조하는 오푸스 데이(Opus Dei)와 같은 우익 가톨릭 단체가 그에겐 더 매력적인 친위세력으로 보였다. 그는 오푸스 데이를 즉각 세계적인 면속구로 승격시키고, 창립자인 에스크리바를 성인품에 올렸다.
그는 로마 가톨릭이야말로 부패하지 않는 진리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순종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울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교회와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가였던 페니 러녹스는 <로마 교황청과 국제정치>(한국신학연구소, 1996)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가장 골치 아픈 교회는 브라질 교회였다고 전한다.
페루는 해방신학의 지적 발상지인 반면,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를 통해 해방신학을 사목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교회였다. 브라질은 민주주의와 빈곤과 외채 문제 해결을 위해 선봉에 섰다.
교황 중심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역교회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하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 “로마가 지배계급처럼 행동한다”고 포문을 연 것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였다.
보프는 <교회 :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을 통해 교회 내 인권과 민주주의를 논하고, 제국교회에 대한 대안으로 민중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를 제시했다. 결국 보프는 1년간 침묵하라는 경고를 받았으며, 결국 사제복을 벗어야 했다.
|
 |
|
▲ 프란치스코 교황이 27일 오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을 거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직후에 서둘러 전임 교황의 시복을 추진했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 재임시에 줄곧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있으면서 해방신학과 대척점에 섰던 라칭거 추기경이었다.
물론 요한 바오로 2세와 라칭거 추기경은 1984년과 1986년에 발표한 교황청 훈령 <자유의 전갈―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과 <자유의 자각―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는 “해방을 향한 민중들의 강력하고도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은,
교회가 면밀히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주어야 하는, 주요한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며 해방신학의 유용성을 승인하고 있지만, 해방신학의 교회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설파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이지만, 교회 안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선을 그으면서 ‘교회개혁’을 주저했다. 물론 요한 바오로 2세와 그의 지지자들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긍정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내내 요한 23세의 개혁 조치에 반대했던 이들은 공의회 문헌 안에 자신들의 전통적 입장을 지지하는 문구를 넣기 위해 다른 교부들과 투쟁했는데,
그렇게 삽입된 문구들이 공의회 정신을 대표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교회와 해방신학이 공의회 정신을 너무 멀리까지 끌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이탈리아 이주민 출신이지만, 이제 그 라틴아메리카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교황직을 맡았다. 아르헨티나 교회의 베르골료 추기경,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그의 제스처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닮았다. 물욕이 없으며 재치 있고 발랄하며 소박하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해방을 후원한다.
그러나 요한 23세 교황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은 겸손하다. 교황중심주의 사고가 없으며, 출세주의와 관료주의를 혐오한다. ‘멀리서 로마에 온’ 그는 바티칸보다는 지역교회를 신뢰한다.
그래서 교황청 개혁 자문단을 꾸리면서 교황청 관료들이 아닌 지역교회에서 두루 인재를 호출했다.
그가 요한 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 교황을 성인품에 올리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교회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현실로 옮기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