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가톨릭 성지

- 순례 - [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19]

dariaofs 2014. 12. 9. 19:08

잠들기 싫은 밤_라베르나 1

 

비비에나에 와서 버스를 탔다. 비비에나는 아주 작은 동네인데 버스 기사가 좀 딱딱해 보여서 함께 탄 할머니 수녀님에게 라베르나(La verna)에 대해 물었다.

 

초행길에서는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우왕좌왕 하다가 내릴 곳을 지나치기 십상이다.

 

혼자도 아니고 이곳 사정도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 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무 대답도 안 하신다. 내가 뭘 잘못했나? 갑자기 위축이 되었다.

 

그러다 수녀님이 내리시길래 ‘아, 수녀님이 내리는 곳이면 라베르나겠지’ 하고는 따라 내렸다. 그런데 아니라는 거다. 성지까지는 한참 더 가야 한다는데.... 난감하다.

 

   
▲ 라베르나 가는 길.ⓒ김선명

 

 

알고 보니 수녀님은 좋은 분이셨고 연로하신 분이라 내가 뒤에서 말하는 걸 못 들으셨던 거였다. 라베르나 성지 아래쪽에 있는 수녀원에 사신단다. 하릴없이 뙤약볕 아래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아스팔트 길을 올라간다.

 

두려움이 많고 내성적인 나, 당황하면 혼자 고민하다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해 버리는 내 모습을 여기서 다시 만난다.

 

나야 할 수 없지만 나 때문에 땀을 흘리며 고생하는 나무 수사는 어쩐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지만 다들 그냥 쌩쌩 지나간다.

 

 여행길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면 이 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편안해질까, 싶기도 하다.

 

사실 그래서 이 길을 떠나온 거지.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이도 출발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을 테니까. 그리고 이 길의 끝에서 그분을 만났을 테니까. 그분은 평화라고도, 자유라고도, 완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분이니까.

 

 

   
▲ 라베르나 성지 입구.ⓒ김선명

 


큰 너도밤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성지 입구가 나온다. 라베르나는 1224년, 성 프란치스코가 죽기 이 년 전에 오상(五傷)을 받은 곳이다.

 

성인이 주님으로부터 회칙을 받았다고 해서 폰테 콜롬보를 프란치스칸들의 시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곳을 프란치스칸들의 갈바리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성인이 오상을 받은 것을 예수님의 수난에 비기는 것이다.

 

성인의 탄생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어서, 피카 부인이 프란치스코를 낳을 때 난산이었는데 마굿간에 가서 낳으라고 해 그렇게 했더니 성인이 태어났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를 ‘제 2의 그리스도’라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불경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최종적으로는 그분을 닮아 그리스도가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니까.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나는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4,19)라고 말했던 것처럼.

 

성지는 산 정상 조금 아래 해발 1128미터 높이에 있다. 이곳은 오를란도 백작이 1213년 5월에 성인에게 선물했는데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처음 온 때는 그 이듬해인 1214년이고,

 

1218년에는 성인의 뜻에 따라 여기에 포르지웅콜라와 같은 크기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경당이 세워진다.

 

 지금은 수도원을 비롯해서 순례자 숙소, 청년들을 위한 집, 피정집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오상 경당에 들러 함께 기도하고,

 

사진 찍느라 고생하는 나무 수사님에게도 여기저기 마음 쓰며 돌아다니는 나에게도 오랜만에 휴가를 주기로 했다.

 

오상 경당 아래 바위를 파서 만들어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경당에 가서 오후 내내 머물렀다.

 

 

   
▲ 순례자 식당(왼쪽),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경당. 안토니오 성인은 죽기 1년 전인 1230년 이곳에 머물렀다.ⓒ김선명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과 끝기도를 바친 뒤 성당 앞 광장에 나와 바람을 쐬었다. 턱수염이 숀 코너리처럼 멋진 수사님 한 분이 눈인사를 하신다. 안드레아 신부님. 밀라노 출신인 신부님은 올해 서품 오십 주년이 되었단다.

 

 피렌체에서 첫미사를 드리셨고 2000년부터 여기 라베르나에서 살고 계신다고. 신부님에 비하면 저는 막 걸음마를 시작한 셈이네요. 웃으면서 벌써 어둠이 사뭇 내려온 세상을 둘러본다.

 

컴컴한 밤, 수도원 성당의 회랑에는 우윳빛 전등이 은성하고 성당 안에서는 ‘온유하신 동정녀여 하례하나이다’(Salve, dolce vergine)를 부르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 끝기도 뒤의 수도원 광장.ⓒ김선명

 

 


오 온유하신 동정녀,
오 온유하신 어머니,
하례하나이다.
당신 안에 온 땅과
천사들 무리 기뻐 뛰나니

주님의 거룩한 성전,
동정녀들의 영광,
당신은 하늘나라 정원에 핀
지극히 부드러운 꽃

....

하늘에는 고운 반달, 저 아래 땅은 은은한 달빛에 잠겨 있다. 옆에 있는 청년들 몇이서 알지 못할 노래를 부른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인가 보다. 다섯 사람의 여학생이 프랑스어로 부르는 성가가 참 아름답다.

 

 마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처럼 아름다운 세상. 시골 외갓집에 온 기분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이 기막힌 보너스를 즐긴다. 잠들기 싫은 이 밤, 정지용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유는 저 세상에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저마다 눈감기 싫은 밤이 있다.”(‘별 2’에서)

 

그래요. 이유는 저 세상에 있지요. 하느님이 주신 평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가 지금 이 땅에 가득 해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김선명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