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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르트의 성채(Castello de Quart). 비바람 속에서도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성채는 내 안의 성채, 무너지지 않고 무너질 수도 없는 고귀함에 대한 묵상으로 연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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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스타 성당 지하에 있는 여행자의 수호자 안셀모 성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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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베레스(Verres)에서 벗에게 소식 전합니다. 지금 기차역에서 비를 피하는 중이에요. 빗줄기가 쉽게 가늘어질 것 같지 않아 플랫폼 벤치에 앉아 편지지를 꺼냈네요.
걷기 시작한 지 오늘로 7일째. 짧은 거리나마 꾸준히 걸어 파파가 계신 곳에 90여㎞ 가까워졌습니다.
걸으면서 자주 몇 해 전에 걸었던 까미노,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생각했어요. 순례자 숙소에서 만나면 발은 괜찮은지 걱정해주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친교를 쌓았던 동료 순례자들을….
오로지 따뜻한 음식과 누울 곳이 간절한 순례자
며칠 걷지 않았지만 이 길에선 그런 위로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곳엔 까미노와 같은 순례자 숙소, 즉 도미트리움이 거의 없어서요.
있다고 해도 적은 규모라 예약을 해야 하는데 전화를 해보면 번호가 바뀌었거나 문을 닫아 결국은 순례자 숙소 명단에 있는 저렴한 호텔을 찾아 짐을 풀 수밖에 없더군요. 그러니 독방을 쓰고 음식도 간단히 사서 먹어요.
숙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오스타(이탈리아 북서부 발레다오스타 지역의 중심 도시) 안셀모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성당에 도착한 것은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었어요.
그때 나는 무척 지친 데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어요. 땡볕 아래 19㎞가량을 걸은 데다 중간에 점심을 먹을 거라 계획했던 마을의 바(Bar)가 문을 열지 않아 비상식량으로 들고 다니던 초콜릿바 2개로 점심을 때웠거든요.
때문에 순례자 숙소가 있다는 성당을 찾아갔을 때에는 머릿속에 온통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서 이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밖에 나가 갓 구워낸 피자를 먹는 것이었지요. 성당엔 수녀님 한 분이 계셨어요. 순례자 증서를 보여주며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지요.
성당에 잘 곳이 없다는 수녀님 말에 ‘울컥’
알고 있는 이탈리아어 단어들을 총동원해서 여러 번 말씀을 드렸더니 내 말을 알아들으신 걸까요? 수녀님이 웃으면서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키며 손짓으로 내려가라시더군요.
숙소가 지하에 있나 보다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했지요.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 이내 깨달았어요. 이런 작고 어둡고 심지어 음침하게까지 느껴지는 곳에 방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계단 끝은 작은 동굴처럼 삼면이 막혀 있었고 오른쪽에 성인상이 서 있었어요. 아늑한 불빛을 받으며 서 있는 성인의 발 아래에는 ‘여행자의 수호자’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요.
안셀모 성인이시라 짐작하고 이번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고 청했어요.
그리고 한참을 앉아 수녀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었어요. 아마도 순례자 숙소에 사람이 다 차서 이곳에 매트리스 하나 갖다 주시려나 보다, 혼자 짐작했었거든요.
까미노에서 성당 안에서 그렇게 잤다는 순례자들을 만난 적이 있으니.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여기서 잘 수 없어요!” 무어라 이야기가 길었던 걸 보면 이유를 말씀하신 것 같은데 이탈리아어를 못 알아들으니….
수녀님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순간, 울컥하더군요. 배낭과 지팡이를 챙겨 나오면서 속으로 투덜댔어요. “이 크고 넓은 공간에서 매트리스 하나 꺼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난 손님 오면 안방까지 내어주는데…!”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내게 다가온 그녀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걱정하는 벗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결론부터 말하면 동화에나 나옴직한 예쁜 방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푹 잤답니다.
거리에서 만난 한 프랑스 여성 덕분이었어요. 성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그녀가 다가와 잘 곳을 찾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도 순례자라면서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로 오라고 하더군요. 작지만 아름답고 친절한 곳인데, 순례자를 위한 방이 하나 비어 있다고요. 냉큼 그녀를 따라갔어요.
순례자 숙소치고 방값은 좀 비쌌지만, 그녀의 말대로 방은 참 아늑하고 좋았어요. 잘 곳을 구해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질문들.
“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 단순한 우연이기만 할까? 내가 잘 곳을 찾아 헤매는지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가와 말을 건넸고, 가던 길을 접고 돌아서 다시 호텔까지 왔을까. 처음 보는 나를 위해….”
아직도 빗줄기가 그대로인 것을 보니 쉬 그칠 비가 아닌 듯합니다. 몸 상태가 좋은 김에 다음 마을까지 3.5㎞를 더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이만 걸음을 멈춰야겠어요. 다시 소식 전할게요.
로마로 가는 길 위에서 그대의 벗, 아가타 <문지온,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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