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코를 떠나시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눈먼 이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꾸짖고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그를 꾸짖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둔감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그사람을 잠자코 있으라고 하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상상하자면 ‘선생님께서는 바쁘시다. 이제 예리코에서의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한다.
거기는 큰 도시고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너 같은 사람에게 마음 쓸 여유가 없다.’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입니다.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생애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는, 인간의 애처로운 모습을 묵묵히 보고 계시지 못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절실한 외침에 가만히 계시지 못하시고 손길을 뻗치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취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정점이 파견입니다.
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을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낙원에서 광야로 추방된 아담과 하와도 현실의 냉엄한을 견디지 못하여 죄의 용서를 청하며 외쳤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의 외침부터 시작하여 구원을 바라는 무수한 사람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대자연의 재해를 만나 토지나 집을 잃은 사람들의 애처로운 외침이나, 큰 나라의 침략을 받아 굴욕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의 밑바닥에 ‘주여, 어서 오소서 언제까지 이러한 일에 침묵만하고 계시겠습니까?’라고 하는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는 필사적인 외침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 사람도 실로 구약의 세계에서 계속 부르짖던 사람들의 계열에 속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소경으로,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길도 닫혀있던 그는,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도 몹시 손상되어 있었겠지요.
그의 절실한 외침을 그를 잠자코 있게 하려는 힘을 물리치고 마침내 예수님의 예수님께 가 닿았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그 사람의 얼굴에는 구원을 향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영근 야고보 신부(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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