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2,38-44)
<가난한 과부의 헌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넣는 '돈'을 보시지 않고,
그들의 '마음'과 '정성'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저 과부는 온 마음을
다 바쳤고, 다른 사람들은 마음의 일부만 바쳤다."입니다.
부자들이 바친 '큰돈'은 그들 마음의 '일부'일 뿐이고,
가난한 과부가
바친 '동전 두 닢'은 마음의 '전부'입니다.
이 이야기의 앞에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계명'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진 것 모두'를 요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의 요구에 온전히 응답한
사람이고,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만 헌금한 부자들은 제대로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요구' 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강압적인 요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주게
됩니다. 목숨까지도.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나의 것'은 모두 '님의 것'.)
그런데 누구라도, 전 재산을
바치면서도 마음의 일부만 바칠 수도 있습니다.
속으로는 아까워하면서, 또는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또는 생색을 내기 위해서
바친다면,
전 재산을 바친다고 해도 예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그 속마음이 안 보이고 전 재산을 바치는 것만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바쳤다면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과부가
가진 것을 모두 바친다는 칭찬을 받기를 기대하고 바쳤다면,
또는 자신의 가난함을 생각하면서 인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바쳤다면...)
예수님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과부의 마음을,
즉 사랑과 정성을 보셨기 때문에 그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전 재산을 바치지 못하고 일부만 조금 바친다고 해도
온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도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면서
인색하다고, 또 정성이 부족하다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비난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가난한 과부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동전 두 닢 가운데 한 닢은 남겨두고 한 닢만 바쳤다면?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그 과부를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
바로 앞에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아마도 분명히 그 율법학자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과부들을 착취해서 모은 재산으로 풍족하게 사는 악인들이고,
또
그들이 바치는 헌금은 그들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들의 돈입니다.
(남의 돈을 빼앗아서 헌금하면서 자기가 헌금하는 것처럼 생색내는
자들.)
반대로 동전 두 닢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는
율법학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과부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법률 상담이나 신앙 상담을 하면서,
또
법률 대리인 일을 하면서 수임료와 수수료 등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돈은 당시의 법으로는 합법적인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일로 보셨습니다.
터무니없이 비싼 수임료와 수수료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합법을
빙자한 강도짓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많습니다.
그런 일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모은 재산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바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흠
없이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신명 17,1).
돈을 바칠 때에도 역시 '깨끗한' 돈이어야 합니다.
남의 돈을 훔치거나 빼앗아서 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도둑질, 신성 모독, 위선 등 이중 삼중으로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품삯을 주지
않으면서,
또는 이웃 사랑 실천은 안 하면서,
헌금만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헌금은 하느님께서 받지 않으실 '카인의
제물'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고
하느님께 바치는 일만 잘하는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여기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이웃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헌금은
하느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흠 없이 깨끗한' 돈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의 전부를 바치는 것도 중요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돈을 바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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