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레오 1세는 아마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사람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로마(Roma)에서 살았고,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와 식스투스 3세(Sixtus III) 밑에서 부제로 봉사하는 한편, 황제의 요청을 받아 에지오 장군과 알비누스 집정관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던 중 식스투스 3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440년 9월 29일에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황제와 교회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 프리실리아누스주의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주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수많은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다. 448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대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 일파와 격돌하게 되었다.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Flavianus)가 내정한 원장이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던 에우티케스는 더욱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451년 레오 교황은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를 소집하여 천주강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교황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권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성좌의 권위는 하느님과 성서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굳게 확립한 위대한 교황이다. 한마디로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다. 그는 1754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강론 : (루카 17,7-10)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이 말씀에 나오는 주인은 참으로 인정 없고 차가운 사람입니다.
또 종은 참으로 고달프고 서러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실제 상황이라면, 종은 겸손해지기는커녕 주인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인들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인정 없고 차가운 분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입니다.
위의 말씀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5-37)."
종이 주인을 위해서 고생하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일을 더 시키는 주인의 모습과
주인인데도 종의 모습이 되어서 종에게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은
완전히 극과 극으로 대조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예수님)은
주님이신데도 우리를 위해서 종처럼 우리에게 시중을 드는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주인이 아니라 종에게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합니다.
이 종은 주인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자랑하지도 않고,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실제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라는 뜻입니다.
"저희는(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라는 말은,
우리가 실제로 '쓸모없는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또 자기가 한 일을 겸손하게 낮추는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또 자기가 한 일을 훌륭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낮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마음으로는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또 고마워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경우에 그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그 사람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는 말은,
맡겨진 임무이기 때문에 수행했을 뿐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이고, 자신이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을 '구원'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들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 구원을 위한 일, 즉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입니다.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니, 즉 내가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니
누구에게 생색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시키시지 않아도 우리 쪽에서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들을 제대로 한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에 무엇이 더 보태지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안 한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8).
주님의 '완전함'은 무엇을 더 보태거나 뺄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완전함'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크게 기뻐하실 것이고, 크게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 내용을 '탈렌트의 비유'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탈렌트는 원래 주인의 돈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을 잘한 종들이 바친 탈렌트를 가져가지 않고 그냥 종들에게 주었고,
그리고 더 많은 일을 맡깁니다(마태 25,21.23).
우리가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제대로 하면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고, 더 많은 일을 맡게 됩니다.
일을 제대로 안 하면,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입니다(마태 25,30).
주님께는 아무런 손해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손해가 됩니다.
지금 이 내용을 아주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다." 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자녀들이 성실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고마워하고 기뻐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다 우리 잘 되라고,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시는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복음 말씀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이고,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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