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8,33ㄴ-37)
<왕이신 그리스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인데,
당신의 왕권과 왕국을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들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의 왕국은 세속의 왕국들과는 다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의 통치 방식은 세속 왕들의 통치 방식과는 다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통치 방식이 세속의 왕국들과 같은 방식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실 때
칼을 빼어 들고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요한복음에 있는 '내 신하들'이라는 말을
사도들과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고,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을 모두 합해도 그들의 힘은 세속적으로는 보잘것없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신하들'은 천사들일 것입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은,
지상의 모든 군대를 다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하늘의 군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천사들의 군대와 함께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군대가 무서워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을 것이고, 회개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그것이 과연 진짜 믿음이 되고, 진짜 회개가 될까?
어떻든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무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세속적인 방식입니다.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라는 말은,
칼로 다스리는 세속의 왕국은 언젠가는 망하게 될
'허무한' 나라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영원하다는 점에서도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 라는 말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만이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신 분이고,
오직 '사랑으로만' 일하신 분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하느님(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자신도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나라가 딴 세상에, 즉 저승이나 하늘나라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입니다.
신앙인은 그 나라를 완성하는 사업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것을 선포하고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당연히 주님께만 순종해야 합니다(사도 5,29).
세속의 권력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또 세속의 법이 하느님의 법과 충돌한다면, 세속의 권력과 법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법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보면, 세속의 권력과 법은 살아 있는 힘처럼 느껴지고,
실제적인 위협이 될 때가 많은데,
하느님의 힘과 법은 멀게만 느껴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도 안 생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니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세속의 일을 먼저 하고,
신앙생활은 우선순위가 자꾸 밀리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다." 라고 변명하는 경우도 많고,
"어떻게 항상 신앙생활만 할 수 있나?" 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날마다 이십사 시간 기도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세속 생활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할 일을 다 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또 '신앙 안에서'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몸은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국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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