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dariaofs 2016. 6. 22. 00:28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순교자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 또는 바울리노)는 로마(Roma)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였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갈리아(Gallia)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고 골, 이탈리아 그리고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Therasia)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의 주교 델피누스를 만난 후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공직에서 물러나 아키텐(Aquitaine)으로 은거하였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 당시에 외아들이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하였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Napoli)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폰디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水路)를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등 수없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그는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Margaret Beaufort)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강론   :     마태 7,15-20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말로 백성을 현혹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경계하시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 관한 비유를 통해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와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대목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들과 그리스도인 모두에 대한 경고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7,16-17)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옳고 그름은 그 결과 곧, 그들의 행실로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신자들을 현혹하는 이단과 무신론, 반그리스도적 사상들, 뉴에이지, 그릇된 신비주의, 혼합주의 등이 넘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가정을 파괴하거나 명예와 재물을 노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말이란 아름답고 호감을 주며, 재치 있고, 경건하며 슬기롭고 매혹적일 수 있으나 ‘거짓’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인가는 행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이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고, 얼마든지 참된 견해와 실제 의도를 은폐하는 수단으로도 쓰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고, 이간질로 분열을 조장하여 양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이런 이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19-20)


이 말씀은 특히 거짓 예언자들에게 해당되지만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과 사랑으로 실천하는 행동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말해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좋은 열매’란 산상설교에서 요구하신 가르침, 곧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올바른 행실을 말합니다.


좋은 열매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영의 열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을 가리킵니다(갈라 5,22).


반대로 나쁜 열매는 육의 열매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당파심, 이기심, 싸움, 시기, 분열 등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만을 찾는 잘못에 빠졌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보다는 순진한 양들의 믿음을 악용하고, 파벌과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보다는 자기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가르쳤습니다. 말뿐이었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맺고자 하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혹 우리 사이에서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경우는 없는지 살펴야겠지요.


또 사나운 이리처럼 자기 인기에 신경을 쓰고, 자기 공적처럼 자랑하고, 자존심을 앞세우며 누구에게든 인정받으려는 삶의 태도는 없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남을 헐뜯고, 상대방의 영혼의 괴로움은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고 제 3자의 말만으로 판단하며, 늘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처신을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로 남을 현혹하고 말로만 사랑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