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7월 9일 다해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dariaofs 2016. 7. 9. 05:00



성 자오롱(趙榮)은 1746년 중국 귀주(貴州)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이고 원래 성은 주(朱) 씨였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방탕한 생활을 했고 20세 때에 옥졸(獄卒)이 되었다.

 

그 당시는 천주교가 사천(四川) 지방에 막 전해졌을 때라 신자들이 조금씩 생길 때였는데, 1772년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은 잡혀가 감옥에 갇혔다.

2년 뒤 매 신부라는 선교사가 새 영세자들을 격려하러 그 지역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매 신부가 열정적으로 진리를 전파하는 모습에 많은 죄수들이 감동했는데, 옥졸로 있던 주영(朱榮) 역시 그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아 며칠 안 돼 교리를 배워 믿게 되었다. 나중에 매 신부가 감옥에서 나갈 때 그를 배웅하면서도 계속 교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매 신부는 1776년 그에게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견진성사도 베풀었다.

매 신부는 그가 신앙심이 굳건한 것을 보고 많은 일을 부탁했고 라틴어도 가르쳤다. 그리고 그에게 성인들의 책을 많이 읽도록 했다. 다른 신부 한 명도 그의 믿음을 보고 위독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게 하는 등 많은 일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성실한 그의 성격과 굳건한 믿음을 보고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청했다. 그래서 1781년 음력 5월 10일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5세였고 성도 조(趙, Zhao) 씨로 바꿨다.

사제가 된 뒤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오롱은 착실하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며 간절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박해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1815년 1월 27일 향년 69세의 나이로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그는 1900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19명의 동료 중국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강론   :    (마태 10,24-33)


<박해>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8-31).”


이 말씀은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박해자들은 우리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죽음이란,
언제 어떻게 죽든지 간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고,
또 그것이 인생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혼의 멸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도 육신도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만 무서워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만 믿고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이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박해를 허락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박해는, 또 이 세상의 죄악들은
하느님의 허락을 받기는커녕 하느님께 거역하고 반항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허락’이라는 말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박해를 내버려 두시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또 카인의 살인 때부터 시작된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내버려 두셨는가?
또 하느님께서는 왜 카인이 아벨을 죽일 때 내버려 두셨는가?
혹시 모르고 계셨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인간들의 일에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사람 쪽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자유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들을 자유의지 없는 로봇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악인들과 박해자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말과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지금 이 내용은 박해자들과 죄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바로 천벌을 내리시지 않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만일에 ‘사울’이라는 박해자가 교회를 박해할 때,
또는 교회를 박해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바로 사울에게 천벌을 내리셨다면?
그러면 사도 바오로는 없습니다.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혹시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르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모르고 계신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시해버리는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다 보시는 분이고,
아주 세세하게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고...)


그래도 어떻든 신앙인들 입장에서는 ‘박해’는 ‘악’이고,
박해를 받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10)” 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한 답이 베드로 2서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여기서 ‘여러분을 위하여’ 라는 말은 지나치면 안 되는, 중요한 말입니다.
앞에서 이미 ‘박해자의 입장에서’ 언급한 것인데,
이 말은 ‘그들’이 아니라 ‘나의’ 회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박해자들과 죄인들을 ‘그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박해를 받기만 했지 한 적은 없다.” 라고 말할 신앙인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과연 몇 명이나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사실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신앙생활과 회개는 완전했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이나 그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겸손’이라는 성덕도 갖춘 사람일 텐데,
진짜 겸손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더 반성하고, 더 회개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다시 강조하시는 말씀이고,
믿음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육신의 죽음이 무서워서 박해에 굴복하고, 그래서 심판 때에
‘수많은 참새들’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어서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