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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용순 할머니는 전신 화상과 남편, 큰딸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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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용순 할머니의 일정이 적힌 수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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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용순 할머니는 1980년부터 33년 동안 중부직업청소년학교 교장을 지내며 배움의 시기를 놓친 학생들을 돌봤다. 송용순 할머니 제공 |
“아이고, 이 하찮은 할머니를 왜 만나려고요?”
96세 송용순(클로틸다) 할머니는 바빴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2~3개 일정이 있었고, 통화하려면 아침 일찍 해야 했다. 처음 전화를 건 지 2주 후에나 인터뷰 시간을 잡았다.
송 할머니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며, 33년 동안 구두닦이와 신문배달원을 하며 배움의 시기를 놓친 학생들의 스승으로 살았다.
“내가 시간은 없어도 늘 웃으며 살았어요. 즐거움을 갖고 살았지요.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을 강렬하게 느껴요.”
백수에 가까운 나이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생기가 넘쳤다.
송 할머니는 1947년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넘어왔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 덕에 황해도 해주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 기예전문학교에서 의류디자인을 전공한 그 시절의 신여성이었다.
월남 후 셋방살이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부산 피난길에 올랐다. 1951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충무로에 양장점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던 만큼 그의 양장점은 단골로 북적였다. 견습생들도 그의 솜씨를 배우려 몰려들었다. 견습생 중에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고 김봉남)도 있었다. 그는 1년 동안 양장점에서 일을 배웠다.
송 할머니는 앙드레 김을 비롯한 견습생들에게 “늘 즐겁게 웃으면서 일하자. 옷을 백번을 빨아도 원형이 망가지지 않는 가치 있는 옷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양장점을 운영하다가 1970년 그는 전신 3도 화상을 입는다. 한겨울, 양장점에서 난로에 물을 끓이다가 난로가 폭발했고 끓고 있던 주전자의 물이 그의 몸을 덮친 것이다. 그는 치료를 위해 잠시 양장점 문을 닫는다.
갑자기 닥친 사고에도 그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부산 피난 시절, 부산 국립사범학교 교무과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1980년부터 야간학교인 중부직업청소년학교 교장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낮에는 양장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그의 품으로 몰려들어 새로운 꿈을 키웠다.
성당에 다녔던 큰딸은 그에게 가톨릭 세례를 권했다. 마흔이 넘은 딸은 “엄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계시지만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그는 “그래, 맞는 말이다!”며 1982년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1984년 그는 잿빛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공직의 길을 걷고 퇴직한 남편이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 그런데 심장병이 있던 큰딸이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딸이 떠난 지 두 달 후 남편도 눈을 감았다. 생기와 미소가 넘쳤던 할머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할머니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는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에 매달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원망이 북받쳐 올랐지만 큰딸이 준 선물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선물은 신앙이었다. 딸 덕에 남편은 대세도 받았다. 송 할머니는 두 아들과 며느리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위로가 느껴졌어요. 딸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점 보러 다니느라 재산을 탕진했을 겁니다.”
그리고 송 할머니는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유산으로 남긴 ‘봉사의 삶, 베푸는 삶’을 이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온 동네 일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 젊은 친구들이 싸우면 말리러 갔고, 배고프고 아픈 이들을 돌봤다.
그는 33년 동안 중부직업청소년학교에서 20여 명의 교사와 함께 800여 명의 학생을 졸업시켰다. 중학교 과정을 밟은 아이들은 대부분 검정고시를 쳤다.
당시 서울중부경찰서의 어머니 선도회장이었던 그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의 친부모도 찾아줬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사랑의 손길을 건넸다.
학생들은 그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제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제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 이 늙은 할머니가 뭐가 대수롭다고 정을 안 떼고 찾아오겠어요? 거기서 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요.”
봉사의 삶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의 수첩에는 한 달 계획이 한자로 빼곡하다. 할머니의 명함에는 ‘고려대 여자교우회 자문위원’ ‘중구 여성단체연합회 고문’ ‘황해도 중앙부녀회 고문’ 등이 적혀 있다.
송 할머니는 한국부인회 총본부 부회장, 서울시 여성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종로본당 성소후원회장도 지냈다.
여성의 사회 참여를 위해 힘쓰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말벗 동무도 되어 줬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201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봉사는 하느님이 주신 숙제였어요. 하느님은 숙제를 못 할 사람에게 숙제 안 내 줘요. 이 하찮은 할머니를 보고서라도 많은 젊은이가 봉사하며 기쁘게 살면 좋겠어요.”
취재 후기
아흔 여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송용순 할머니는 활력이 넘쳤다. 2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동안 할머니는 깔깔 웃다가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깔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손녀뻘 되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 이런 생활을 유지하는 거면 괜찮은 거지? 이게 다 하느님 작품이야.”
운동할 시간이 없어 운동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체력은 놀라웠다.
“봉사에 대한 보상을 건강으로 주셨어. 하느님 덕이 아니고선 내가 이렇게 살 수 없지!”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자기 주장만 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할머니는 달랐다. 그의 청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지혜 기자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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