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9월30일 다해 연중 제26주간 금요일(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6. 9. 30. 06:59



달마티아(Dalmatia)의 아퀼레이아(Aquileia) 근처 스트리도니아(Stridonia)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성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Hieronymus Sophronius, 또는 예로니모)는 12세 때 로마(Roma)에서 당시의 저명한 문법학자인 도나투스(Aelius Donatus)의 문하생으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19세 때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Trier)에 정착하여 정부 관리로 일하였는데, 이때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하에 같은 뜻을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 안티오키아(Antiochia)에 머물면서 라오디케아(Laodicea)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그 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으며, 사막의 은수자인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성 바오로(Paulus) 전기"를 썼다. 그런데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Arius) 이단 문제로 대립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79년 안티오키아로 갔을 때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울리누스(Pauli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곳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3월 9일)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서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Helvidius)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녀 마르첼라(Marcella, 1월 31일)와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 등이 주축인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그의 후원자이던 다마수스 교황이 서거하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일부 적대자들이 여자들의 집에 들락거리는 히에로니무스를 의심하고 비난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성녀 바울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귀족 부인 성녀 바울라가 따라와서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그리고 성녀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의 원장을, 성 히에로니무스는 남자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맡았다.

그 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서 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반박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Jovianus)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논쟁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오리게네스의 지지자이며 성서 번역에도 공이 있던 루피누스(Rufinus)와의 사건이었다. 그는 오리게네스주의 논쟁과 관련하여 루피누스를 반박하는 호교론을 썼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서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415년에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os)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 펠라기우스주의자인 폭도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후 성 히에로니무스는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중 한 사람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루카 10,13-16(16.9.30)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Jesus Reproaches Unrepentant Towns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책하시는 주님의 사랑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우주만물의 세계와 인간의 이치,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지 묻습니다(욥기 38,12-21).


그러자 욥은 보잘것없는 자신이 대답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40,4). 욥은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겸손한 자세로 고백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줌에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하여 불행하다고 선언하시며 질책하십니다(루카 10,13).


회개하지 않는 카파르나움 주민들에게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10,15).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질책하신 것은 멸망을 바라셔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셔서 안타까운 나머지 강한 ‘사랑의 경고’를 하신 것이지요.


겸손하게 회개하여 자비의 나라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초대인 셈입니다.

서방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인 예로니모 성인은 탁월한 성서학자요 수덕가이며 영성상담가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저술가이도 합니다.


그는 늘 악과 불의와 거짓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과 정의와 진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강하고 솔직했습니다.


빨리 화를 내는 성격이었지만 곧바로 후회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더 엄격함으로써 겸손하게 주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찾기도 전에 다가와 사랑으로 함께 하시고, 좋은 것을 끊임없이 주고 계시지요.


나의 생명, 건강, 재능, 시간, 가족과 공동체, 신앙, 하느님의 말씀, 아름다운 자연,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순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지 않은 채 무심코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문제는 무딘 마음, 중심성과 방향감각의 상실,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물질에 길들여지는 익숙함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의식과 양심,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면 주님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이 사랑이신 주님이 아닌 나 자신과 세상이 되어버릴 때, 무엇을 하든 내 인생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릴 것입니다.


물질세계와 감각세계에 익숙해져가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을 알아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가을의 모퉁이,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벤치에 앉아 지금껏 알게 모르게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돌과 같은 굳은 마음을 내려놓고 영의 감각, 깨어 있는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면 합니다.


주인인양 착각하며 방향을 잃고 헤매던 나를 바라보며, 가을 잎새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 교향곡을 연주해보아야겠습니다.


일상의 익숙함에 젖어 본성을 따라가는 발걸음을 멈추어 창조의 새로움에 자신을 던져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당신 사랑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만의 길을 걷는 나를 향하여 안타까운 사랑의 질책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을 끌어안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을 맞곤 하는 나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요, 주어지는 모든 것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임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선과 사랑과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기억하고, 마음을 열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님께 되돌아가는 기쁜 회개의 날이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