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사도들이 주님께 청을 드린 게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 본다. 믿음을 더한다는 게 무얼까 수십 번 되묻다가 ‘더하여’라는 말에 한참 머문다. 그리스말로 ‘프로스티테미(προστίθημι)’인데 ‘기존에 존재하는 것에 다른 무엇을 보태다’의 뜻이다.
이를테면, 신앙이라는 게 이미 있었고 사도들은 거기에 더한 무엇을 요구하는 셈이다. 신앙은 자꾸만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는 사도들의 신앙에 무언가 더 보태어 주실 텐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도들의 바람은 거부된다.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바다에 심길 수 있는 걸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답한다.
대개 겨자씨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신앙이 크고 깊지 않아도 제대로 된 신앙이 있으면 뭐든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이어진 대개의 기도는 겨자씨만 한 신앙이라도 주십사 청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과연 그럴까. 겨자씨는 믿음의 크고 작은, 혹은 깊거나 얕은 측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일까. 오히려 어떤 믿음이라도 존재하는 것이라면 뭐든 가능하다고 이해하는 게 맞지 않을까.
예수는 신앙을 겨자씨에 빗대어 설명하였지, 겨자씨의 ‘성장’과 ‘발전’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게 아닌데 말이다.
밭에서 일한 종의 비유도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의 가치를 굳이 끌고 들어올 이유는 없다.
종은 종으로서 밭이든 식탁에서든 제 일을 했을 따름이다. 주인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종의 신분에서, 그 삶의 일관된 방식에서 예수는 신앙을 이야기하고 싶은 게다. 밭이든 식탁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종은 종으로서 살면 된다.
더 나은 종의 삶, 더 나은 신앙적 삶은 어쩌면 존재치 않는다. 지금 어찌 사는가, 지금의 자리에 늘 내일의 자리를 끌고 들어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사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지금을 잃어버린 채 지금을 반성한답시고 신앙을 더해 달라며 예수에게 따지듯 청을 드리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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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가.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 ||
산다는 걸, 신앙하는 것으로 작정하고 시작한 게 사제의 삶이다. ‘잘’ 살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며 ‘지금은 아닌데....’ 하는 실망과 후회,
그리고 반성이 적절히 혼합된 이도 저도 아닌 거짓투성이의 생활을 근근히 꾸려가고 있는 지금이 꼴에 신앙한다고 작정한 삶의 결과다.
제 방에 틀어박혀 글로써 세상을 재단하고 좌익 인텔리인 양 설쳐 대는 것도 조금은 스스로에게 식상한 지 오래다. 과연 나는 신앙하는 것일까. 제대로 잘 사는 것일까. 지금 사는 꼴을 스스로 거부하고 단죄하는 건 아닐까.
종은 주인에게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쓸모없다’라는 뜻의 그리스말은 ‘아크레이오스(ἀχρεῖος)’인데, ‘이익을 내지 못한다’라는 의미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무언가 덧붙여 만들어 내어야만 ‘잘’한다는 사상적 편향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익이 없고, 덧붙여지는 게 없더라도, 그리하여 지금 꼴이 못마땅하고 모자란 듯해도, 그게 신앙이다.
신앙은 하느님을 흔적으로 담아 내는 것이지,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삶이 아니다. 완전함에 대한 성장주의적 지향이 신앙을 더럽히고 모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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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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