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쿤체빅(Joannes Kuncevyc)은 당시 폴란드 관구였던 현 우크라이나의 볼린(Volyn) 관구에 속한 볼로디미르(Volodymyr)라는 작은 마을에서 1584년에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 부모의 가업을 잇기 위해 상업을 배우러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의 포포빅(Popovyc)이라는 사람의 도제로 보내졌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주인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을 물려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하고, 1604년 빌나에 있는 바실리우스회의 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여 요사팟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성 요사팟은 1609년에 비잔틴 전례에 따라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즉시 설교로 유명해진 한편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함께 입회했던 그의 친구 룻스키는 삼위일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폴란드에 새 수도원을 세우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1617년 그는 러시아 비텝스크(Vitebsk)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폴로츠크(Polotsk)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기 시작하였다.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하여 시노드를 소집하여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즈음에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주교들이 요사팟은 실제로 라틴 전례의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주교를 내세웠다.
그래서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지만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며 비텝스크로 사목방문을 가던 중에 새로운 정교회를 주장하는 분리파에 의해 도끼와 총탄으로 죽임을 당해 드비나(Dvina) 강에 던져졌다.
그는 첫 번째 동방 교회 성인으로서 '일치의 사도'라 불리며, 164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강론 : (루카 18,1-8)
<기도>
11월 12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18장 1절-8절,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루카
18,2).”
따라서 ‘불의한 재판관’이 일하는 모습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그는 어떤 과부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그 과부가 계속 졸라대자 너무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줍니다(루카 18,3-5).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은 그런 불의한 재판관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7-8)”
‘불의한 재판관’은 사람에
대한 사랑도 자비도 없어서 미적거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너무 귀찮아서 마지못해 판결을 내려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고,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비유의 내용 안에서는
그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이니
그의 판결이 정말로 올바른 판결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판결은 항상 올바른
판결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억울해하지 않고, 부당한 판결이라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 요나서에 있는
니네베라는 도시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요나가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했을 때,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단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취소하셨습니다(요나
3,4-10).
말하자면, 살려달라는 니네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단식기도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했던 요나 예언자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요나 4,5).”
요나는 자기가 예언한 대로 니네베가 멸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혹시 니네베를 멸망시켜 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닐까?
만일에 그랬다면, 하느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기도는 들어
주시지 않고,
니네베 사람들의 기도만 들어 주신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기도는 누구의 기도일까? 또 어떤 기도일까?”
(반대로 물으면, “하느님께서 들어 주지 않으시는 기도는 누구의 기도일까?
또 어떤
기도일까?”)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기도는 당신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또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동정’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또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회개하면서, 살려
달라고 간청한 니네베 사람들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이고,
그 도시를 멸망시켜 달라고 청한 요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기도가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의 기도를 지체 없이 들어 주신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요나의
기도를 아예 들어 주지 않으신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루카복음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이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 말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주십시오.”
라는
기도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를 꾸짖으셨습니다(루카 9,55).
그 일도 역시 사람들의 멸망은
하느님(예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인들을 심판해 달라는 두 사도의 기도는
거절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느님이지만,
당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결코 들어 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인지를
먼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으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아무거나 청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청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이고, 올바른 믿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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