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칼라 수녀가 지난 10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암마을 성당 앞 작은 오두막에서 낯선 이국 땅에서 보낸 50년 세월을 회상하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
국민훈장 모란장 강칼라 수녀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 노벨평화상의 주인공 테레사 수녀의 삶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경구다. 한국 땅에도 ‘마더 테레사’처럼 가난한 병자들과 평생을 살아온 이방인 수녀가 있다.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에서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을 찾아와 50년 동안 이 땅의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감싸 안아준 수녀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암마을에 사는 강칼라(75) 수녀는 지난해 말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외국인 수녀가 국민훈장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국민 추천제 형식의 국민훈장을 받은 강칼라 수녀는 누구인가.
무엇이 그녀를 지구 반대편인 이 땅으로 인도했을까. 신앙의 힘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낮은 자세로 평생을 봉사했다는데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
여러 의문 속에 지난 10일 전북 고창의 호암마을에서 강칼라 수녀를 만났다. 호암마을 성당(공소) 앞 작은 집에서 마주한 노(老)수녀의 왼쪽 손목엔 30년쯤 된 듯 보이는 낡은 손목시계가, 책상의 메모지 위엔 손가락 두 마디보다 짧은 몽당연필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름 모를 청년이 입다 버린 오래된 겉옷을 걸쳐 입고도 만면에 웃음이 넘쳤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Coif)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수도자의 기품이 서려 있는 듯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났지만 노수녀의 검소하고 자신을 낮춘 삶은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 돈이면 안 될 것이 없다는 황금만능 사회, 권력으로 불릴 정도로 비대해진 종교 등 우리 안의 어그러진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소감부터 여쭤 보겠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눈높이만 맞췄을 뿐인데 큰 상을 받게 되니 감사합니다. 이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 많을 텐데,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 식구들과 우리 동네(호암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받은 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호암마을 형제자매들이 저에게 더 큰 축복이고 큰 상입니다. (상을 받고, TV 방송에 나온 뒤) 최근에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어요. (아파서 오시는 분들보다) 실의에 빠져, 낙담하셔서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돈 많은 재벌이나 지위가 높은 분들이 아니고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바쁘기는 하지만 좋아요.”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50년 봉사했으면 국민훈장을 받을 만하지 않나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낮은 곳에 웅크려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없이 제 몸을 낮은 곳에 두고자 했습니다.
동혜원이라고 불렸던 나환자촌인 호암마을에서 첫 인연을 맺었는데, 와보니 이곳 아이들이 부모의 병력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인근에 초등학교 분교를 세우고, 좀 큰 아이들은 살레시오(돈보스코) 야학에 입학시키기도 했습니다.
120여 명쯤 되지요. 1980년대에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달동네에서 활동했는데 맞벌이 가정 아이들이 방치되다시피 했지요. 공부방을 운영하고 작은 유아원도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80여 명의 어린아이들을 돌봤습니다.
요즘은 거동이 불편한 (호암마을) 주민들에게 식사 준비를 해주거나 시장, 병원, 은행에 함께 가주고 종교적인 사목 활동도 병행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호암마을에 처음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이 마을은 6·25 전쟁 이후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입니다.
지금은 특별히 한센 환자들은 없지만 60여 명의 주민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죠. 가난한 마을에서 이들과 함께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왔으니 어떨 땐 친정 식구 같고, 어떨 땐 친구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가톨릭을 믿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이 마을이 알려지면서 가끔 힐링을 위해 찾는 분들께 드리기 위해 음식도 만들고 뒷바라지도 하고, 또 함께 명상 시간을 갖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저보고 천사 수녀라고 하지만 칼라 수녀를 빗대어 ‘흑백 수녀’라고도 부릅니다.”
―수녀님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은 사람이 몇 명 정도 될까요.
“숫자로 일일이 세보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한 곳에서 같은 환자를 계속 돌봐야 하기 때문에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대략 수천 명은 될 것 같은데 정확한 숫자는 못 헤아리겠어요.”
―1960∼1970년대 초기에는 몸이 아픈 환자들이 많았고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를 거치면서 도시 빈민들을 돕거나 어린이 교육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것 아닌가요. 최근에는 고령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 많고요. 시대적 변천을 좀 설명해주시죠.
“맞아요. 초기에는 결핵이나 한센병 등 중증 환자들이 주 대상이었어요. 환자 고름도 짜고 상처를 닦아주고, 옛날에는 약도 변변치 않고 병원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요즘은 이곳에서 나이 많은 노인들을 돌보고 있지만 1970∼1980년대에는 서울 등 대도시 빈민들 틈에서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 이름이 좀 특이해요. ‘강칼라’가 본명이신가요.
“‘칼라’라는 이름은 천주교 신부를 하시다 돌아가신 2살 터울의 오빠를 기억하기 위해 붙인 세례명입니다. 제 본명은 리디아입니다. 이탈리아 발음으로 오빠의 세례명이 ‘카를로(Carlo)’라고 하는데 저는 여성이어서 ‘카를라’로 붙였습니다.
카를라가 이곳에서 발음이 편한 ‘칼라’가 된 거죠. 마침 이름 앞에 성이 있어야 한다며 한센병 환우인 강 엠마뉴엘(연령 미상)이 출산을 앞두고 자신의 ‘강’ 씨 성을 받아 달라고 추천했어요.
사실 한국에서는 이상할 게 없는 ‘강’이라는 발음이 이탈리아어 사투리로 특정 동물을 뜻하는 의미거든요.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저는 뭐 여기는 한국이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강’이라고 성을 붙였죠.
엠마뉴엘도 자신이 낳은 딸에게 저와 똑같은 ‘강칼라’라는 이름을 붙여 줬어요. 그러니까 강칼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이 된 거죠.”
▲ 강칼라 수녀가 지난 10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암마을 명상센터 안에서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
―이탈리아 고향의 신부였던 오빠 이야기를 하시던데 가족 관계는.
“고향의 형제는 4남매였어요. 언니는 방글라데시에서 저와 같은 선교회 소속 활동을 하고 있고, 두 살 위 오빠는 제가 한국에 올 무렵 사망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여동생 가족만 살고 있죠. 19세 때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 들어가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수녀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에도 전쟁고아와 한센인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처럼 결심해 선교회를 따라 호암마을로 들어온 거죠.”(6·25 전쟁 직후, 가난과 차별에 밀린 한센인들이 모여 정착한 한센 마을은 전국에 100개가 넘었다. 호암마을도 그중 한 마을이다.)
―이탈리아의 고향은 어디신가요.
“한국에 많이 알려진 동계 올림픽이 열린 토리노에서 남쪽으로 90여㎞ 떨어진 쿠네오라는 곳입니다. 쿠네오는 알프스산이 멀리 내다보이며 지중해(리구리아해)와도 가깝죠. 프랑스와 국경도 멀지 않습니다.
아마 그 옛날 로마로 진격하던 한니발 장군이 지났던 곳 아닐까요. 그곳에서 마시모 다첼리오(Massimo d’Azeglio)라는 학교(5·3·5·3 학제 중 고교와 대학을 겸한 학교)를 졸업하고 수녀 생활을 시작한 것이죠. 사실 이탈리아 국민 95%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요즘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50%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당시 자연스럽게 수도원과 가톨릭 수녀원도 많았었죠. 사실 한국에 산악지대가 많다고 해도 쿠네오만큼 높고 험한 산골은 아닙니다.
쿠네오는 알프스를 배경으로 경치도 아름답고 물이 풍부해 포도주와 초콜릿이 유명합니다. 한국에 온 뒤 50년 동안 4번 정도 방문했습니다.”
―가톨릭 수도자의 길을 가겠다는 결정에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요.
“부모님 두 분 다 가톨릭 신자여서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오빠도 이미 신부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죠. 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좀 일찍 돌아가신 편인데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섬김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분이셨죠.”
―전북 고창은 서울에서 멀고 이탈리아에서도 잘 알지 못했을 텐데, 특히 50년 전이면 찾아오기 쉽지 않았을 것 같고요.
“당연히 쉽지 않았죠. 당시만 해도 (작은 자매 선교원)본원이 있는 진주에서 여기를 오는데 버스편으로 몇 번을 갈아탔는지 몰라요. 경남 함양으로 넘어와 전북 남원, 광주로 이동했다가 고창으로 넘어오는 코스였죠.
지리산을 넘어오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도로가 미끄러워 버스 기사가 위험하니 모두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고 해서 걷기도 많이 걸었습니다.”
▲ 강칼라 수녀가 작은 몽당연필에도 하느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강칼라 수녀와 대화 도중 책상 위에 놓인 몽당연필이 눈에 띄었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도 안 되는 몽당연필, 너무 검소한 것 아닙니까.
“(엷은 웃음을 보이며)이렇게 짧은 몽당연필이라도 이것은 하느님의 연필입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작은 몽당연필이라도 좋아하는 것을 그리시는 데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십니다.”
(검소한 생활의 일부로만 알았던 몽당연필에 하느님의 ‘불완전한 도구’라는 의미와 얼마든지 큰 그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지며 우문현답에 접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한국어 실력이 좋습니다. 따로 말하고 쓰기를 배우셨는지요.
“(연세대에서 한글 배울 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저도 이탈리아에서 사범대 과정까지 마친 사람인데, 여기 앉아서 ‘기역’ ‘니은’ ‘디귿’ 또는 ‘가갸거겨고교’ 등을 배워야 할 때 눈물 좀 흘렸죠. 사실 어렵기도 하고 잘하고 싶은데 안 되고, 심지어 어떤 신부님은 ‘내가 바보처럼 이렇게 살지 못하겠다’면서 포기하고 가버린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한글을 모르면 어떻게 이 땅에서 수도자의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글학교를 마치고도 잘 이해되지 않는 한국어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꼭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라고 물어보죠. (상대방은 제가) 한국어가 서툰데도 다 알아들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제가 이해할 때까지 되물어 봐야 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겸손하지 않았으면 못해냈어요. 가끔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없어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어려운 사람 만나면 꼭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어려운 단어’를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병간호나 교육·의료 봉사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얼마 전 (국민훈장)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해준 분(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이 생각납니다. 30여 년 전쯤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봉사활동할 때 만난 인연입니다.
혈관이 막히고 발이 썩어들어가는 큰 병을 앓고 있었어요. 큰 병원에서 인공혈관으로 대체하는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성모병원에 입원시켜 대수술을 했습니다. 당시 제가 잘 아는 교수님이 직접 12시간도 넘게 진행한 수술이니까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수술이 잘돼 지금도 살아 계시는데 그때 병에 지치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그런지, 큰 수술 뒤끝이라 아파서 그런지 ‘못 살겠다, 내 혈관 다시 넣어달라’ 성화를 부리고 매일매일 전화로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신경질이)얼마나 심했으면 남편도 도망가고 아이를 돌볼 사람도 없고 해서 그들을 일일이 뒷바라지해줘야 할 때 너무 힘들었어요. 최근 (방송에 나간 뒤 보고 싶다고)전화 연락이 닿았어요. 너무 기억에 남는 분이십니다.”
―호암마을에서의 하루 일상이 궁금합니다.
“오전 6시쯤 일어나 30여 분 정도 기도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합니다. 주로 가벼운 식사로 시작하는데 하루 종일 몸속이 편안합니다. 4년 전쯤 이곳으로 오신 피에라 수녀와 함께 마을 주민들 뒷바라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손빨래 많이 하고 마을 할머니들 병수발에 읍내 병원·시장·은행일 돕기, 공소 미사 준비까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살고 있어요.
요즘은 마을을 찾는 분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도라지 주먹밥도 만들고, 마을 할머니들과 도자기 만드는 시간도 따로 마련했어요. 지난해에는 명상의 집에 설치한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창문도 만들었죠.”
―깜짝 질문인지 모르지만 수녀님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습니까.
“특별하게 감추고 싶은 비밀은 아니지만 개인 침실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어요. 또 한가지는 얼마 전 TV 방송에 공개돼 버렸는데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 자리와 류머티즘으로 뒤틀린 발입니다.
사실 (방송에서) 발을 내보일 때 많이 창피했어요.”(강칼라 수녀는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발가락이 기형적으로 변하는 변형성 관절염 증상이 심하고, 무릎도 10여 년 전 인공관절로 대체했다.
등도 언덕처럼 굽고, 머리는 백발에 얼굴 주름살도 깊지만 늘 편안한 표정에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오시게 된 사연이나 배경이 따로 있는지요.
“이탈리아에서 수녀가 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당시 한국에 왔던 5명의 선발대 수녀 중 한 분이 몸이 아파 이탈리아로 되돌아왔어요. 누군가 한 명이 대신 와야만 했죠. 제가 선뜻 나선 거예요. 얼핏 전쟁을 치른 땅이라는 정도만 알았어요.
어려운 사람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수도자의 길을 택한 저로서는 생면부지의 땅일지라도 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죠. 결정은 어렵지 않았으나 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어요.”
―한국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가 이 땅에 정착할 당시 전쟁 후 가난이 이어지며 어렵던 시기였을 것 같은데요.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1963년, 수녀회가 처음 한국땅에 자리 잡았죠. 경제적, 정신적으로도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사회의 냉대 속에서 힘들게 살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더 힘든 시기였겠죠. 한센 환자 정착촌, 달동네 판자촌, 윤락가는 물론 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함께 살아왔어요.
행려 환자, 결손가정의 아이들과 청소년, 독거노인 등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인 거죠. 현재 본원과 수련원은 경남 진주에 있고 서울, 전북 고창, 경남 창원, 부산에 프라테르니타(소공동체)가 있습니다.”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는 왜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진주에 본부를 둔 거죠.
“처음 지리산 자락인 경남 산청의 프란체스코 선교회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성심원이라는 곳인데 공동 활동을 하다 소속이 달라 가까운 진주에 따로 독립한 것이죠.
물론 서울 등 대도시로 갈 수도 있었지만 교회의 가르침이 늘 ‘낮은 데로, 작은 데로’였기에 진주에 본원을 둔 거죠.”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라는 이름과 Movimento Contemplativo Missionario Padre De Foucauld라는 이탈리아어 이름의 의미가 다릅니다. 종교적인 의미가 같은 호칭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탈리아어로는 ‘푸코 신부의 뜻에 따라 사는 선교회’라는 의미인데, 한국어로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라고 명명했죠. 근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샤를 드 푸코 신부(1858∼1916)와 안드레아 가스파리노 신부를 알아야 합니다.
푸코 신부는 프랑스 출신이고 가스파리노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인데, 우선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 창립자는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1923년 이탈리아 북쪽 지방인 보베스라는 곳에서 출생, 1947년 사제서품을 받고 4년간 로카비오네 본당에서 사목하다 1951년부터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소년 마을’을 시작해 ‘작은 자매 형제 관상 선교회’의 모태가 됐습니다.
1960년 브라질을 시작으로 한국, 마다가스카르, 케냐에 진출했고 방글라데시에 이어 에티오피아, 홍콩, 모스크바, 알바니아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또 선교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푸코 신부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선교회 이름이 이탈리아어로 ‘푸코 신부의 뜻에 따라 사는 선교회’쯤 됩니다. 푸코 신부의 봉사 정신을 따른 선교회지만 엄연히 가스파리노 신부가 창립한 다른 조직입니다. 사실 푸코 신부를 따르는 분파 선교회는 더 많습니다.”
―수녀나 수사 등 수도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규칙이나 지침, 기준이 있습니까. 종교적인 청빈도 중요하다던데.
“천주교 수도자들도 불교와 비슷한 수행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선불교에 참선 문화가 있다면, 가톨릭에는 사막의 은수자(隱修者·숨어서 도를 닦는 사람)라고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치열한 수도 문화가 있습니다.
불교적 수행이 해탈을 목표로 한다면, 가톨릭은 신비적 합일과 구원의 은총을 갈구합니다. 깨달음은 철저하게 고독한 수행을 요구하는 것이죠. 특히 가톨릭 수도 문화는 공동체적 사랑을 중시합니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은총도, 구원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원망하는 가족을 뒤에 둔 출가는 무책임한 도피일 뿐입니다. 가족은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면서 또한 끝까지 보듬어야 할 대상입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도, 친구도,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기꺼이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하게 평생을 헌신하는 ‘청빈’ ‘순결’ ‘순명’의 서원(誓願)도 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서는 연말이 되면 교회(공소) 안에 모인 금전을 ‘0’(제로)로 시작합니다.
비워야 채우기도 하지만 필수적인 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알고, 남는 재화를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나눌 줄 아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종교적인 생활을 떠나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말씀을 한마디 해주신다면.
“가정교육을 말하고 싶어요.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 어린 시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부모들이 특별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모범 생활을 하다 보면 말없이 전달됩니다.
사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성장 후 되돌아보면 ‘아, 우리 부모가 고마운 분이구나’ ‘바른 분들이구나’하는 마음이 생기고, 타인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
긍정적인 마음’이 정착하게 되는 것이죠. 각종 사회문제도 결손가정이 큰 원인입니다. 올바른 부모, 따뜻한 가정을 지켜야 하는 큰 이유죠.”
인터뷰 = 박팔령 차장 (전국부)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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