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쌍충사
- 전라남도 기념물 제 128호
<충렬공 이대원, 충장공 정운 영정>
< 충렬공 이대원 할아버지 영정 >
쌍충사는 충열공 이대원(1566∼1587년)과 충장공 정운(1543∼1592년)을 배향한 사우이다.
이대원은 선조 20년(1587) 녹도만호로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고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인근 주민 향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인 이대원사당(李大源祠堂)이다.
정운은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선조 24년(1591) 녹도만호로 부임하였는데 임난시에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옥포·한산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청하여 선조 25년(1592) 위를 합향하였다.
이 사당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불탄 뒤 숙종 7년(1681) 사우 중건을 추진하였고 이듬해인 숙종 8년 (1682) 임조·서봉영 등 호남유림 연명의 청액소(집의 신명주찬)를 올려 숙종 9년(1683) 1922년 고흥향교 선비들의 협력으로 강당을 짓고
1924년 신실까지 지었으나, 1942년 일인(日人)들에 의해 다시 폐허화 되었다. 1947년 녹도쌍충사 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1957년 신실과 강당을 개축하였다.
쌍충사는 봉암리 해안가 높은 언덕위에 있다. 전면으로는 녹동항구와 소록도가 보이는 지형으로 전면의 자연경관이 매우 훌륭하다.
이 언덕위에는 쌍충사만이 있으며 1947년에 중건된 사당(17.8㎡)과 1957년 건립된 강당(757㎡) 사각대문, 관리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당의 좌향은 임좌병향이며 건물의 배치는 맨 위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집 사당(신실)을 배치하였다.
이곳과 2.5m의 지반차를 두고 형성된 아랫단의 좌측으로 동향하여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겹처마로 꾸민 팔작지붕의 강당을 배치하였다. 대지 우측밑으로는 강당고 마주보게 관리사를 배치하였다.
▶ 쌍충사
쌍충사는 충열공 이대원(忠烈公 李大源)과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을 배향한 사우이다.
이대원(1566 ~ 1587)의 자는 호연(浩然)이고 함평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남보다 뛰어나 18세때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선전관이 되었으며, 이어 녹도만호에 부임하였다. 이대원장군은 비록 젊은 나이였으나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자 즉시 출동하여 왜적과 싸워 적장을 포로로 잡아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겁이나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장군이 역전하는 것만 보고있던 심암은 평소 이대원 장군과 정분이 있던 여인에 대한 흑심이 있었던차에 그 공로마져 탐이 난지라 그를 불러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릴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장군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심암은 며칠후 전세를 다시 확장하여 쳐들어오는 수많은 왜적과 남은 군사로 싸울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를 죽일땅으로 들여 보낸셈이었다.
출정하기 전 이대원장군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약속받고 기다렸으나, 구원병이 끝내 오지 않으니 수많은 적선에 둘러싸여 피어린 싸움을 하다 마침내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항복을 종용하는 적앞에서 굽힘이 없이 호령하던 장군은 적선의 돛대에 묶여 처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에 앞서 관찰사의 장계로 심암과의 일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심암 대신에 이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이장군이 순국한 다음의 일이었다.
후에 이 억울함을 문중과 이장군의 여인이 상소를 올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운(1543 ~ 1592)은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태생으로 본관은 하동, 자는 창진(昌振)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정충보국(貞忠報國)」의 사자(四字)가 새겨진 가전보검을 들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였다 하며,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한 뒤 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판관(居山察訪, 熊川縣監, 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평소 강직한 천성탓으로 재임중에 상관들과의 알력과 시기의 대상이 되어 순탄한 성장을 하지 못하였으며, 49세 되던 1591년 류성룡의 천거로 녹도만호에 임명되었다.
녹도만호진은 왜적이 침입하는 길목일 뿐 아니라, 임명된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바로 한해 전 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공의 순절보국은 천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은 만호로 부임한 즉시 군기와 병선을 예의 점검하고 응변의 준비를 철저히 함으로써 당시 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아낌과 칭찬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玉浦海戰·唐布海戰·閑山海戰) 등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부산포해전에서 쫓겨가는 적을 추격하다가 몰운대(沒雲台)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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