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군도에 있는 將軍城碑 > < 장군도에 있는 이량장군의 防倭築提碑(방왜축제비) >
조선 1497년 (연산군 3년)에 수군절도사 이량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수중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해저석성입니다. 이 석축은 연산군때(1497) 이량이 이곳 절도사로 부임해와 금오도에 나타난 왜구선을 쫓고, 전라좌수영을 보다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수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섬과 돌산도 사이에 목책(木柵)의 흔적도 보이며, 뒤에 사람들은 이량의 비를 충무동에 세워 비각을 만들었고 장군도에도 이량장군 방왜축제비를 세웠(현재 군자동 472 진남관내로 이동)으며, 이충무공전공 기념비도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일제하에 심은 벗꽃 1천 그루가 봄이면 만개하여 온산 가득하고 바다낚시 포인트로도 유명하답니다.
이량장군은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무장으로 ?어난 활약을 보인 함성군 이종생의 아들이며, 현재 화성시 봉담면에
장군묘소와 사당, 선산이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저의 16대조 할아버님 이시네요.
<장군도와 수중성(將軍島와 水中城) 유래>
옛 문헌에 "장군성(將軍城)은 참경도(斬鯨島) 동쪽 항구에 있는데 홍치(弘治) 정사년(1497) 이량이 두 번째 이곳에 절도사로 와서
안찰하였다. 수영의 남쪽에 항구가 있는데 가운데 섬이 하나 우뚝 솟아 있어 파도가 거세게 치니, 예로부터 해적이 이곳을 경유하여
침입하는 까닭에 물위에 돌을 쌓아서 바다를 가로질러 성곽을 만들었다. 이후 도적이 감히 남쪽 백성을 엿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을 "장군도(將軍島)"라 하고 빗돌을 세워 공덕을 기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할 때는 욕지도-남해도-돌산으로 이어지는 섬을 따라 우리군대를 피해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따라서 장군도와 돌산 사이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구가 침범하면 잡기가 어려웠고 이를 막기 위하여 장군성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여년 전인 연산군
3년(1497) 이량 장군이 왜구를 막기 위해 장군도와 돌산 사이에 제방을 쌓은 이 성은
국내 유일의 수중성으로, 장군도에는 "將軍城"이라고 음각된 비석이 있으며 이량 장군의 후손들이 두 차례에 걸쳐 세운 "방왜축제비
(防倭築提碑)"가 있다. 남해안의 비경- 장군도를 참조하시면 장군도와 장군성(水中城)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살펴 볼수 있습니다.
1914년도에 여수에서 처음으로 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벗나무가 1,000여 그루나 있어 봄에는 꽃물결을 이뤄 시민의 휴양지로 한 몫을 하고 있다. 현재는 섬 둘레가 콘크리트길로 만들어져 있고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가보고 싶으면 중앙동에서 돌산도로 가는 나룻배가 있는데 그 배에 부탁하여 장군섬을 찾을 수 있다.
장군섬에 쌓았던 돌들은 인근 주민들이 건축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반출한 관계로 지금은 수성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여수는 세 마리의 용이 어울려 여의주와 같은 장군도를 두고 다투는 형국이라고 설명한다.
그 첫째용이 건너편 바라다 보이는 종(鐘鼓山)을 때리는 타봉(打棒)처럼 생긴 대교동의 예암산(隸岩山)이요,
둘째용이 돌산도요,
셋째용이 경호도(鏡湖島)이다. 이 중 경호도는 비룡(飛龍)으로 비유되고 있으나, 고려 때는 귀향 온 사람들이 살았던 섬이라 해서
경도(京島) 또는 경호도(京湖島)라 불리다가 일제 때 경호(鏡湖)로 바뀌었다.
이량 장군 방왜축제비(李良將軍防倭築堤碑)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 240호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진남관 내)
이비(碑)는 전라좌수영과 돌산도 일원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1497년에 전라좌수사 이량이 광양과
남해쪽으로 연결되는 중요 해로인 장군도와 돌산도 백초 사이에 쌓은 방왜축제(水中城)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1710년에
건립하고 1735년에 중수한 79cm x 54cm x18cm(가로x세로x두께)규모로 일반 형 비석이다.
앞면 좌측에 이장군함천군휘량방왜축제비(李將軍咸川君諱良防倭築提碑)라 종서 대자로 음각하고 14행의 비문이 실려 있으며,
뒷면에는 원비의 건립 연대와 중건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 해안 방비 역사 및 국방 유적에 대한 연혁과 관련인물의 행적을 알 수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량의 8대손 구군절도사 이삼(李森)이 비문을 빚고 이경열(李景說)이 글씨를 써서 좌수영 서문 밖(현재 충무동)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현 비각의 받침돌과 함께 이곳으로 옮겼다.
[이량장군 영정과 묘소 재실 -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 335-3]
(1446~1511)
[산소의 전체적인 구조가 거북모양입니다]
[ 이량장군 재실]
함천군(咸川君) 이량(李良)할아버지 /
墓誌銘, 將軍島水中城史蹟碑文, 永保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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