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6월 19일 가해 연중 제11주간 월요일(성 로무알도 아빠스)

dariaofs 2017. 6. 19. 00:30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강론   :  마태 5,38-4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악을 굴복시키는 선과 사랑

 

구약성경에는 함무라비 법전(196조) 등 고대법에 나오는 동태복수법이 나옵니다(탈출 21,24; 신명 19,21).

 

사실 이는 잔인한 보복법이 아니라 무한정 보복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마저도 폐지하시고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며,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5,39-42) 하십니다.

 

이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선을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오른뺨을 치려면 왼손바닥이나 오른 손등을 써야 합니다. 유다법에 따르면 손등으로 뺨을 치는 것은 모욕적인 행위로 보아 두 배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뺨마저 때리도록 돌려 대주는 것은 그 심한 모욕마저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마라 하신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고 알거지 상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겉옷은 밤에 이불로도 사용하기에 유다법으로도 압류가 금지된 품목이었지요.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않는 것은 소유권을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악에 악으로 맞서지 말고,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악에는 그 악을 품고도 넘칠 정도의 선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선(善) 밖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악에 악으로 맞서면 악은 더 세력을 떨치고, 폭력은 악순환될 뿐입니다. 악을 이기는 것은 선과 사랑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을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춰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당시 로마군의 식민통치에 무력으로 저항하다 많은 사람이 처형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서민들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로부터 무시를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군의 식민통치와 동족 지도층 모두에게 핍박 받는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비폭력을 권하셨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사랑을 비폭력으로 권고하신 것이지요.

경쟁의식이 팽배한 오늘 우리 사회에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전쟁과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폭력의 악순환을 봅니다.

 

강대국에 의한 보복, 경제 보복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불의와 불평등, 구조악과 폭력 앞에 반드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선만이 해결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도 모욕과 멸시, 오해와 비난, 손해와 상처를 참지 못하고 맞받아치는 경우가 많지요. 의견 차이나 사소한 오해로 상대방에게 폭언을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감정의 회오리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합니다. 악감정과 분노가 조정하는 대로 자신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사랑으로 기다리고 견디며, 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악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상대방도 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악과 폭력에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요 선뿐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가 진정한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악 앞에 침묵하거나 묵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을 분별하되 비폭력의 방법으로 저항하고 정의를 세우며, 사랑으로 악을 선으로 바꿔가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복음선포이며, 회개로 주님과 일치하는 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