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7월 10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9장 18절-26절,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인데,
이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또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몸의 병이나 잘 고치는 예언자, 또는 의사가 아니라,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예수님께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복을 청하는 믿음이 아니라,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아마도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 14장과 마르코복음 6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했는데도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태 14,35-36; 마르 6,54-56).”
“... 구원을 받겠지.” 라는 여자의 말에서 ‘구원’은 ‘병의 치유’를 뜻합니다.
그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구원’은,
영적 구원(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뒤늦게 확인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여자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나를 믿어라. 내가 너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여라.
그 구원은 내가 주겠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바로 그때에 여자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그때부터 여자가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했고,
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몸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구원’은
몸과 영혼을 모두 구하는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이 이야기는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마르코복음 5장과 루카복음 8장을 보면,
그 회당장은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23; 루카 8,42).”
(마태오는 이 이야기를 기록할 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결과’만 기록하고,
세부 사항은 덜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하혈하는 여자를 만나셨고,
그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는 동안 회당장의 딸이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5,35; 루카 8,49).”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의 상황도
이 이야기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자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알렸는데(요한 11,3), 예수님께서는 소식을 듣고 즉시 가신 것이 아니라,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고(요한 11,6),
라자로가 죽은 뒤에야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것은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주기 위해서,
즉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회당장의 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즉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시는 은총을 주셨는데,
이것은 당신이 병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계시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 권한과 권능은 곧 모든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23-26).”
예수님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저 병을 잘 고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긴 잠’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영원한 생명은 찾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 찾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눈앞’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 신풍성당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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