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자료

[인터뷰] 함평 이씨 대흥공파 18대손 이미란씨

dariaofs 2017. 7. 31. 18:33

 "600년 가문이 일궈놓은 터전, 목숨 걸고 지킨다"

 

 함평 이씨 대흥공파 고덕 몽곡리 높은뫼 선산과 종중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17대 종손과 18대손이 사당 앞에서 나란히 서있다.
 

 

손(宗孫) : 종가(宗家)의 대(代)를 이을 자손을 일컫는 말.

 

부계사회에서 '대'는 아들이 잇는다. 큰아들에서 큰아들로 이어지는 '종손'은 숙명이다. 그런데 사회가 다변화되고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되면서 종손이라는 이유로 고향에만 묶어둘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먹고살기 바쁜 젊은이들이 임무에서 제외되면서 한국의 문중문화가 점차 옅어지고 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혹은 아직도 '출가외인'으로 '감히 집안일에 나설 수 없는' 딸이 종중 살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종택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함평이씨 대흥공파 18대손 이미란씨다.

 

잠깐 있을 생각이었는데...

 

 

 이씨는 “어려서부터 ‘고생하신 우리 엄마는 나중에 내가 꼭 돌봐야지’했는데 힘들때면 마음에도 없는 말로 짜증을 내고 만다”며 속상해 한다. 주말도 없이 노부모를 모시면서 그정도 짜증이 뭐 대순가.
                                ▲  <무한정보>

 

이씨는 종갓집 맏며느리인 어머니가 고생하는 걸 보며 컸기에 "고향에 내려와 살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3년 전 아버지가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의사는 "일주일을 넘기시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고 10년 전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한 어머니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제가 형제들 중에 움직이기 제일 쉬운 여건이었어요." 정말 잠깐 있을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회생했고, 어머니를 돌보는 요양보호사가 있었기에 다시 떠날 수도 있었지만, 이씨는 올해로 3년째 종택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30대까지는 외국계회사에 근무하며 동남아와 미국 등지로 출장을 다니고, 그 뒤로는 직접 사업을 하며 서울과 중국을 누비던 이씨를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고향 마을'이었다.

 

"어려서 그렇게 싫었던 시골인데, 지내보니 너무 좋은 거예요. 보세요, 우리 동네 참 아늑하죠? 겨울에는 따뜻하고, 시끄럽지 않고, 공기도 좋고."

 

 항아리 안에서 장맛이 깊어지고 있다. 장맛변하지 말라고 붙여놓은 종이버선과 이씨가 장독대에 심어놓은 채송화가 그림 같이 예쁘다.

 

7남매 중 여섯째, 딸로는 막내인 이씨는 그렇게 부모님의 삼시세끼를 챙기고, 선산과 사당, 종중회관과 땅을 관리 하는 '종갓집 딸'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입향조는 함평이씨 함성군파 파조로 함경도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종생의 둘째 아드님인 이공 할아버지예요.

 

입향조 할아버지가 1500년대 초 대흥현감으로 오시면서 이곳에 터를 잡아 '대흥공파'가 됐고, 종중회관 이름도 대흥회관입니다.

 

이곳 마을 이름을 '높은뫼' 혹은 '원덕이'라고 부르는데요, 대흥공이 대흥현감을 역임해 '원댁'으로 부르던 것이 구전돼 '원덕이'가 됐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했다는 얘기지요."

 

함평이씨 대흥공파 17대 종손 이재소(96, 고덕 몽곡리)씨의 딸, 미란씨가 숨도 안쉬고 집안 역사를 줄줄이 풀어놓는다. 요즘 세상에 이럴 수 있는 후손이 얼마나 될까.

 

종사가 제일 먼저인 아버지

 

 “사진은 왜 찍는겨?”“예산서 왔댜. 신문에 싣는댜”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 묻자 더 바짝 당겨앉으며 부드러운 음성 그대로 거듭 말해준다. 결혼한지 올해로 74년째, 글자 그대로 ‘백년해로’ 중이시다.

 

"아버지는 평생 종사만 돌보셨어요. 자식들보다 늘 종중이 먼저였죠."

 

하지만 종손들이 아무리 애를 쓴들, 종부(종갓집 맏며느리)만 하겠는가. 이씨의 어머니 구자순(94)씨에게 고생한 얘기 좀 해보라니 "다 잊어버렸어"하고는 껄껄 웃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옹이 거든다.

 

"고생 많이 하구말구. 영의정 지낸 학자집안 외동딸로 자라 아무것도 몰르는 사람이 종갓집으로 시집와 고생 많이 혔지. 옛날이는 종갓집으루 모두 모이니께.

 

정월이믄 집안 아니라두 근처 젊은애들 다 세배다니구 했어. 지금들은 암것도 아녀. 수돗물이나 있나, 그때는 물 져다가 아궁이 불 때서 다 밥해 멕이구 했으니께."

 

세상이 편해지고 좋아졌다지만 아쉬운 것도 있단다.

 

"우리 때는 하룻밤만 자고 와도 부모께 꼭 절을 했어. 부모가 어디 다녀오셔두 꼭 무릎 꿇고 절하구. 지금들은 머리만 까딱하믄 그만이여. 내 자식부터두. 그래서 절하라 가르치지."

 

얘기하는 내내 "내가 17대 종손"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 이옹은 "나이 아무리 많은 일가래두 종손을 첫째루 알아주구, 밥두 제일 먼저 외상으로 받어, 지금까지두"라며 가슴을 편다.

 

96세의 나이에도 지팡이를 짚고 앞서는 걸음걸이나,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는 말투 모두 참 정갈하고 꼿꼿하다. 한 집안을 대표하는 종손의 품위가 느껴진다.

 

딸이 종가일을 보고 있는 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얘가 혼나지, 다른 애들은 다 각각 있으니께."

 

서울서보다 더 바쁜 일상

 윗대 할아버지가 심은 느티나무 두 그루 가운데 한 그루가 살아남아 400년 넘는 시간을 이어오고 있다. 느티나무를 지나 올라가면서 종중회관과 사당, 종택이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관리자는 이재소 옹이다.
 빨간 망사옷을 입은 700여덩이의 메주가 종택과 사당, 회관 추녀 끝에 매달려 있다. 모두 이씨가 혼자해 낸 과정이다.

 

이씨가 돌아온 뒤로 마을이 더 환해졌다. 깔끔하고 부지런한 이씨는 사당과 종중회관은 물론, 선대 할아버지가 심어 400살이 넘은 느티나무 주변, 마을어귀까지 지저분한 것을 보고 넘기지 못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이씨는 한국천주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못자리로서 이웃마을인 별암(대천리), 황무실(호음리)과 함께 해나가야 할 사명들로 마음이 분주하다.

 

조상 중에도 순교자가 4명이나 나와 종중에서도 관심이 많다. 이씨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예산군이나 천주교회의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종중에 건의해 순교자현양비를 세웠다.

 

또 지난해부터는 직접 장을 담가 주위사람들과 나눠먹고 있다. 어려서 어머니 심부름하던 기억을 되살려 언니와 함께 담갔는데, 어머니의 장맛을 기억하는 자매들의 대를 잇는 손맛에 호평일색이다.

 

이씨는 불과 2km도 안 되는 곳에 들어설 예정인 폐기물매립장 반대투쟁에도 열심이다. 환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농촌에서 쓰레기를 다 태워버리는 것을 보고 20년 전부터 분리한 쓰레기를 서울까지 싣고가 배출할 정도로 일상속 실천을 해오던 터였다.

 

"입향조 할아버지가 터를 잡으신 뒤 600년 대대로 살아온 터전입니다. 어린시절 부터 부모님이 여기를 지키려고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다 보고 컸기 때문에 저도 목숨 걸고 지킬 겁니다."

 

그러고 보니 산업단지가 크게 조성되고 고속도로 나들목이 생겨 복잡하고 넓어진 큰 도로 아래 마을이건만 차도 찻소리도 언덕너머로 묻혀 평화로운  높은뫼, 원덕이다. 함평이씨 대흥공, 후손 대대 살아가도록 터 한번 잘 잡으셨다.

 

[오마이뉴스장선애 기자]2016년 9월 12일

 

함평이씨 종친회 대표카페(hammlee family representative cafe)

   cafe.daum.net/hammlee